“마음이 깨끗해야 좋은 글씨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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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깨끗해야 좋은 글씨 나와”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06.1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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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노산 최난주 선생.

노산 최난주 선생은 “서예는 점과 선획의 태세, 장단, 필압의 강약, 경중, 운필의 지속과 먹의 농담,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산을 산이라 적으면 사람들은 가볍게 여기고 산을 山이라 적으면 사람들은 무겁다고 서슴없이 말들을 하네.”

국내 서예계에서 한글작품을 즐겨 쓰는 작가로 널리 알려진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60)선생.

노산은 한글을 가벼이 여기는 세태를 빗대 이렇게 비꼬았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서예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뽑히면서 한국 서예가의 거물로 우뚝 섰다. 50여년 넘게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가까이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노산을 들여다본다.

노산은 1977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의 제자로 입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예계에 발을 디뎠다.

“글씨 쓰는 작업은 자신의 마음을 선으로 표현하는 예술행위입니다.” 50년도 넘는 세월동안 붓과 먹을 벗 삼아 살아온 노산 최난주 선생은 서예란 “선을 통해 그려진 마음”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노산선생은 “선이란 붓이나 연필 등을 사용해 그은 줄금획”이라며“이는 사물이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서로 맞닿으며 이어지는 자리 또는 서로 가름되고 한정되어지는 경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일과 일, 물건과 물건의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가름 짓는 단순한 한계선경계선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노산선생은 “서예가 무엇인가 완벽하게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중요한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며 “지금도 마음 한켠에선 본질을 알아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털어놨다.

노산선생이 붓을 처음 들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전부터다. 1956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했으니 50년을 훌쩍 넘은 필력이다. 고향인 고창 공음에서 서당 훈장이셨던 선친 밑에서 형들과 함께 한학을 공부했다. 당시 나이에 비해 영특했던 노산은 분판에 글씨를 쓰고 또 쓰며 글씨쓰기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좋다는 주변의 평에 20대 후반까지 방송 아나운서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인 1977년, 드디어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서예계의 대가였던 故 강암 송성용선생 제자들의 모임인 연묵회에 들어가면서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한다.


노산 최난주 선생은 “결국 깨끗한 마음에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써놓은 글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본 동료는 그를 강암 선생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해주는 중매 역할을 해줬다. 그는 이후 벼루에 먹을 갈고 또 갈았다. 화선지에 마음을 그리고 또 그렸다. 강산도 변한다는 10여개 성상이 지난 1987년, 드디어 노산선생은 국전 초대작가에 등극한다.

전북에서는 최연소인데다, 강암선생 문하에서 조카(아산), 아들(우산)에 이어 세 번째 국전 초대작가가 된것이다. 그에 앞서 1983년, 서예계에서는 유일한 상인 원곡서예 상을 받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한 해 한명에게만 주어지는 원곡상은 서예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의 상중에 하나다.

전북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서예 외에도 별도로 직업이 있는 탓에 경제적인 곤란이 적은 탓도 있지만, 결국 주변사람들에게 신세지는 것이 싫어 노산은 개인전을 외면한 채 홀로 정진만을 고집해왔다.

그런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때였던가, 강의를 구경하러 갔었습니다. 당시 강사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 저를 향해 개인전 한번 못한 사람은 작가라 볼 수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강사는 본인을 의식치 않고 했던 말이었지만, 심장은 고통을 쳤습니다.”

당장 개인전 준비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온몸으로 매진했다. 그의 정열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전시회는 성대한 모임으로 이어졌다. 노산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 글씨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글씨는 여러기관에 많이 소장돼 있다. 특히 1996년 자신의 역작 ‘농가월령가’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월령가는 가로 9m, 세로 2m를 넘는 대형병풍 작품으로 글자 수만도 8,000자에 이른다. 게다가 초대형 크기여서 운반하는데도 장정 4명이 동원돼야 할 정도다.

내용면에서도 글자 한 자도 땜질하지 않은 완성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거쳐 작품을 기증받았다. 노산의 ‘월령가’기증도 미술관의 작품수집심의위원회가 작가의 경력과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심사한 결과, 수십명의 경쟁 작품을 물리치고 기증케 됐다.

이 작품은 현재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으며 가끔 지방 순회 전시되고 있다. 노산은 “서예는 점과 선획의 태세, 장단, 필압의 강약, 경중, 운필의 지속과 먹의 농담,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뤄진다”며 “이는 결국 깨끗한 마음에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북교육문화회관장을 끝으로 교육공무원을 마감한 노산은 전주교육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영숙(57)장학사와의 사이에 종윤(32), 훈(30) 형제와 현정(27·서울대 대학원)양을 두고 있다./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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