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중(고창군 문화시설팀장)
판소리 대가 동리 신재효가 동학농민혁명사(이하 ‘혁명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세상 떠난 지 10년 만에 혁명이 일어났고, 사생활이나 판소리 사설에서 동학과 연관시킬 직접적 표현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함에도 필자는 혁명사 중심에 신재효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봉준 등 많은 이들이 동학농민혁명(이하 ‘혁명’)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연구논문(한국역사민속학회 손태도 등 6명)에서 신재효 사생활과 판소리 사설 속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동학정신이 담겨져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손화중이 설 수 있게 하였다. 손화중(1861-1895)은 20세에 동학에 입도한 후 22살 때 부안과 정읍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포덕(布德)활동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그는 신재효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한 23살경 고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고창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이 가장 늦게 전파된 지역에 속한다.
셋째, 전봉준이 설 수 있게 하였다. 전봉준(1855-1895)은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신재효와 가까운 동일 고창읍내에서 살았다. 그리고 혁명 선두에 설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자존감이 형성 완료되는 8세를 지나 조정기를 거치고 있던 나이인 13세에 그는 고창을 떠난다. 이후 전봉준은 혁명 발발 2년 전에 동학에 입도하여 고부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지도부의 리더쉽 미성숙과 지역주민의 시대의식 부족으로 민란 수준을 벗어나는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그는 방향을 바꾸어 고창과 인근지역 민중, 그리고 손화중을 선택한다.
그 결과 전봉준은 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 내용들을 감안할 때 ‘신재효는 혁명사의 중심에 서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고창에서는 고창학을 새롭게 정립하고 역사·문화를 재조명 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혁명사도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한 우발적 파동(波動)의 역사에서 벗어나 신재효에 의해 수십 년간 철저히 기획된 대역사로 새롭게 쓰여 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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