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성명'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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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성명'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 투데이안
  • 승인 2009.06.2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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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한 뒤, 남북관계는 냉온을 오가며 부침을 계속해왔다. 남북관계가 극적으로 진전되는 일도 많았지만, 이는 대부분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의 입지를 공고하게 다지는데 활용되며 빛을 잃었다.

그동안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고 전 세계를 집중시켰던 일은 무엇이 있었나 모아봤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이다.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남북은 통일의 원칙으로, 첫째,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한다고 선언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오기까지 통일의 이정표이자 원칙으로 여겨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 천명된 것이다. 이 성명은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 남북은 성명에서 남북은 상호 중상비방과 무력도발의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고 이같은 합의사항의 추진과 남북 사이의 문제해결, 그리고 통일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성명은 큰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당국자들간의 비밀회담만을 통해 만들어진데다가, 통일 논의를 국내정치 상황에 활용하려는 남북 지도자들의 의도에 따라 빛을 잃고 말았다. 남북조절위원회는 1973년 중단됐다.

◇1985년 9월20일 첫 이산가족 상봉

1985년 9월20일 남북의 이산가족이 처음으로 상봉했다. 첫 이산가족 상봉은 1984년 여름 남측에 발생한 수해 피해에 대해 북측이 구호물자 지원을 제의함에 따라 그동안 잠정적으로 중단됐던 적십자 접촉이 제개된 뒤, 1985년 5월 '남북 이산 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 공연단'을 상호 교환하는 방식으로 성사됐다. 한국전쟁 직후 시작된 남북간 이산가족문제의 해법 논의가 첫 성과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분단 40년, 한국전쟁 휴전 32년 만에 첫 이산가족 상봉의 물꼬가 열렸지만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기까지는 다시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했다. 2차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15일에 성사됐다. 2000년 '6·15 공동선언 2항'에서 합의한 바에 따라 그해 8월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성사된 것이다.

이후 남북은 2005년9월부터 금강산 온정리 조포마을 앞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만들어 보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수시로 상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1994년 정상회담 추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기 6년 전인 1994년, 남북 정상은 회담을 갖기 위해 상당히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국가 주석과의 정상 회담을 제의했다. 정상회담에 가교를 놓은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다. 북한 김일성 국가주석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평양회담에서 남북 정상 회담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조건 없이 빠른 시일내에 만나고 싶다'는 김 주석의 응답을 남측에 전달했다.

이후 남북 고위급 간 정상회담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영덕 국무총리은 6월20일 북한의 강성산 정무원 총리에 남북정상회담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제의했고, 3일 뒤 북한은 이에 동의했다. 남북은 6월28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부총리급 비공개 예비접촉을 갖고 실무절차 합의서를 채택했다.

7월1일에는 실무대표 접촉이 진행됐고, 7월7일에는 통신실무자들이 접촉해 평양 체류기간 중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했으며, 8일에는 경호실무자 접촉이 이뤄지는 등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분단후 한번도 성사되지 않았던 남북 정상의 만남이 코 앞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7월9일 김일성 주석이 급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고, 남북관계는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2000년~현재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

남북 경제협력 및 민간교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개성공단 건설과 관련된 협의는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이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개성공단 건설사업은 2002년 8월 7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이후 남북은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에서 북한의 개성공업지구법 제정에 합의했으며, 5차 경추위에서 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식 개최에 합의했다.

착공식 이후 개성공단 설계를 위한 지형측량과 토질조사를 거쳐, 1단계 부지조성공사는 2004년 4월부터 2006년6월까지 진행됐다. 용수와 환경 기초시설, 전력, 통신 등 1단계 주요 기반시설은 2007년 10월에 모두 완공됐다.

2008년 말 현재 개성공단에는 총 93개 기업이 입주해있으며, 이들 기업은 3만8226명의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

1998년 11월18일 금강호가 동해항에서 북한의 장전항을 향해 출발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은 2000년까지 20만명이 방문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2002년 중단위기를 겪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자가 과도한 투자비용에 따른 자금난을 호소하는데다가 해로관광에 따른 긴 이동시간과 통제가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은 2003년 육로관광을 실시를 합의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이어나갔다. 2006년 7월에는 외금강호텔이 개장했고, 10월에는 농협 금강산지점이 개설됐으며, 2007년부터는 내금강 관광이 시작됐다. 2008년까지 금강산 누적 관광객은 193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2008년 7월11일 북한군의 총격에 의해 우리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 금강산 관광은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2000년 6월12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방북길에 올랐다. 분단 이후 55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 정상회담은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됐으며, 이는 김정일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회담의 주요 내용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정착,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남북간 교류와 협력 등이다. 남북정상은 이 회담에서 5개항으로 이뤄진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남북은 첫째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둘째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협의, 셋째, 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넷째, 경제협력 등을 비롯한 남북간 교류의 활성화를 약속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진 회담이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회담이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 부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남북 최고 지도자들은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核)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2007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한 후속회담으로 같은 해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남북 총리회담이 열렸고, 12월4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으며, 11일에는 문산~판문역을 운행하는 개성공단 화물열차가 개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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