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義? 야합?'…정치연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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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義? 야합?'…정치연대의 역사
  • 투데이안
  • 승인 2011.04.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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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선거철이 도래했음을 알게 해주는 단어가 '통합' '연대' '대연합' 등이다.

대의(大義)와 현실성이라는 명분을 통해 극적으로 성사되는 정치연대는 한국 정치사에 여러차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줬다. 반면에 선거전략을 염두에 둔 '야합'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거셌다.

◇3당 합당부터 시작된 대권 연합

한국 정치연대의 역사는 1990년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간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이 시초로 꼽힌다.

3당 합당은 한국정치사의 연대공식을 처음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군사정권 이후 현재 한나라당의 전신인 보수적 민주정권 민자당의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3당 합당을 통한 거대 여당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합당 과정에 내각제 합의각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당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국민적 의사를 무시한 채, 장기집권을 획책한 '정당 쿠데타'라는 비판과 함께 '3당 합당'이 아닌 '3당 야합'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1997년 15대 대선은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김종필 전 총리간의 연대, 이른바 DJP 연합이 있었다.

DJP 연합은 한국 정치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김 전 총리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정치공학의 산물'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연대의 역사는 어김없이 재연됐다.

지지율 3위를 달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후보단일화에 극적으로 성공하며 선거기간 내내 지지율 1위를 달리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대선을 하루 앞둔 정 전 대표의 지지 철회가 논란이 되면서 순탄치 못한 정치연대의 공식도 반복됐다.

◇야권연대의 꿈, 실현될까?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등 야5당과 시민단체는 야권연대를 통해 예상치를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다.

중앙당 차원의 전국적인 야권연합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지역별로 후보 단일화 작업에 나서 16개 광역단체 중 11개 시·도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30곳에서 단일후보를 냈다.

6·2 지방선거에서의 야권연대는 합당을 거치지 않은 최대의 성과물을 이끌어 냈다는 평을 들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3년 만의 정치적 실험'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실제로 6·2 지방선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6월까지 통합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야권연대의 성과만큼 역대 정치연대들의 징크스와 같이 어두운 이면도 존재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심상전 진보신당 전 대표와 후보단일화에 성공했지만, 결국 김문수 경기지사에 패배했다. 이 과정에서 심 전 대표는 당내 공식 허가를 받지 않고 유 대표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는 이유로 1년간 당원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향후 총선·대선에서의 야권연대가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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