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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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
  • 김정기
  • 승인 2014.01.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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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면서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화해라는 구호가 나온 적이 있었다.
배경이야 어떻든 간에 당시에 나는 참 좋은 뜻이라고 생각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핵심적인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두 축을 이끈 주역들이 21세기를 맞아 서로 화해하고 융합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화해`라는 말 때문이었다. `화해`라는 말은 갈등, 반목, 대립 등이 전제돼야 성립할 수 있는 단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화해를 해야 하는 게 당위라면, 우리 역사 속에서 그 둘은 서로를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히고 할퀴며 살아 왔고 그러한 지난날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뿐인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력동원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하면 된다”는 강력한 의지 아래 권위주의 정권은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비판은 용납되지 않았고 성장과 효율이 지상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부정됐고, 국민의 자유는 억압되고 제한됐다.
 
양지가 있다면 음지가 있다. 경제성장이 양지였다면, 경제개발이 낳은 부정부패의 창궐, 빈부격차의 심화 등은 음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경제개발이 국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것의 성과는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았다. 그것이 권위주의 경제적 성장배경이었다.
 
반면, 우리나라가 자유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에 경제를 맡겼다면 지금과 같은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많은 느낌표와 물음표가 필요한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 독재의 억압이 워낙 극심했던 탓이겠지만, 민주화는 의식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인간은 빵과 자유 모두를 원한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주화가 성공했던 시점이 하필이면 경제성장이 완료된 때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이제 와서, 과거에 엄연히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성취와 잘못을 함께 떠안아야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과거의 성취란 경제성장이고 잘못이란 독재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화해를 이루려면 우리는 어떤 원칙과 기준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지난 반세기의 전반부에 산업화의 바람이 불었다면, 후반부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둘 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든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이렇게 모진 바람이 불면 모든 게 휩쓸려 날아가는 법이다. 옛 것은 이렇게 청소된다. 역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행운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만큼은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산업화의 시대에도 민주화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민주화의 시대에도 공장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이자 지혜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경제도 일정 궤도에 오르고, 민주주의도 성숙된 단계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해에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더라도 적절한 계기가 있어야 손도 내밀 수 있고, 내민 손도 잡을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정치사회 현실은 어떤가. 이 계기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모든 기회는 활용하기 나름이다.
`IMF사태`는 우리국민의 애국심과 국민성에 전 세계국민들은 부러워하고 감동을 넘어 존경까지 했다. 참으로 위대한 국민이라고, IMF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손을 잡고, 국가와 민족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우리는 그 기회를 산산이 조각냈고, 그 조각을 지금도 더 작게 조각내고 있다. 우리국민은 세계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신세였다는 게 드러났었다. 산업화에는 성찰이, 민주화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외형적인 경제성장만을 쫓다가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민주주의 와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한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 탓은 네 탓이 되고, 네 탓은 내 탓이라는 성찰과 책임이 앞으로 우리가 가다듬어가야 할 집단적 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김정기 한국정치사회 숲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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