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호 전라북도교육감
6월은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달이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 민족은 지난 반세기 동안 6.25전쟁, 6월민주화항쟁 등 극단적인 비극과 격정, 환희를 차례로 겪으며, 6월의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전북 교육의 지휘를 맡고 있는 최규호 교육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가 전몰군경유족으로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애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추모하는 제 54회 현충일을 맞이해 최규호 교육감과 특별한 인터뷰를 가졌다.
▶먼저 전몰장병유족으로서 제54회 현충일을 맞은 감회를 말씀해 해주십시오.
“정말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유가족이 아닌 평범한 분들도 어렵게 살아온 시절이니, 유가족들은 말할 것이 없겠지요. 저 역시 아버지가 안 계신 것에 대해 서럽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입니다.”
▶선친께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사하셨나요?
“그때 저는 어려서 기억이 없고요. 당시 정황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해방 직후 좌파와 우파의 갈등과 대립은 매우 심했습니다. 그리고 48년 4월에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났어요.그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14연대를 급파했는데,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지역의 경찰서를 점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지요. 그 당시 선친께서는 부안경찰서 형사과 외근주임으로 근무하시면서 부안 내변산(청림리 실상사)에서 여순사건 관계자들을 소탕하라는 작전 수행을 하시다가 전사하셨습니다. 저희 선친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다수가 희생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선친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워낙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주위 어른들께서 당시의 정황을 말씀해 주시면서 국가를 위해 일하다 값있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마음 한 쪽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그 빈자리가 더 커 보이고, 또 사무치게 그립기도 했었습니다만……”
▶교육감님이 몇 살 때 선친께서 돌아가셨습니까?
“4살이 되던 해 3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를 남겨두고 가신 것이지요. 하지만 국가를 위해 임무를 다하다 가셨기에 어머님의 상처는 남들과 달랐습니다. 아버님 빈자리를 대신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사셨지요.”
▶당시에 어렸다고 하시니 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셨겠네요?
“어머니께서는 20살에 한 살 연하이신 아버지와 결혼하셨는데 27세에 혼자되셨으니까, 결혼하신 지 8년째 되던 해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후 긴 세월 혼자서 어려움을 다 겪어 내신 걸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 홀로 형제들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신 어머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사셨어요. 하지만 상황 판단을 잘 하시는 지혜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라도 자녀를 잘 키워내려 모든 정성을 다 쏟으셨지요. 특히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교육열이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가정교육에서 특별한 것은 지금도 눈에 선한 회초리예요. 늘 머리맡에 회초리를 두셨습니다. 항상 안색이 부드럽고 웃음을 잃지 않는 인자하신 분이셨지만, 우리 삼 형제 잘 키우기 위해 회초리를 아끼지 않은 강인한 분이셨어요. 저도 웃는 인상인데 제 웃는 모습이 어머님 모습 그대로 닮았다고들 합니다.(웃음)”
▶어머니가 어려운 시절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어머니 자신이 외가에서 배운 가정교육과 오직 세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놓고 저승에서 아버님을 뵈어야한다는 의지가 원동력이었던 같습니다. 당시 혼자되신 어머니들의 보편적인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 전몰 유족으로 어머니의 특별한 교육 철학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삼 형제에게 나라 일을 하는 지도자가 되라는 큰 뜻을 심어주셨습니다. 특히 법대로 진학하여 판검사가 되어 약자의 편에 서서 일하라고 세 아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성장하여 돌이켜보니 어머님이 강조하신 생활 철학이 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리더십에 관한 내용이더군요. 또한 자신이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큰 뜻을 품고 나라 일하게 되면 꼭 농촌을 보살피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심지 굳게 저희를 키우신 걸 보면 교육 철학이 투철하신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어머니의 힘은 정말 대단하지요.”
▶할아버님의 보살핌으로 세 형제가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집이 세시고, 독선적이셨습니다. 전형적인 옛날 어른의 모습이셨지요. 그러나 손자들에게만은 늘 관대하셨고 무엇보다 공부에 열중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최규호 교육감님 형제분들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저희는 삼 형제입니다. 형님께서는 전라북도축산진흥연구소장으로 퇴임하신 후에 전몰군경 유자녀들을 돕는 일에 힘쓰시고 계십니다. 동생은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전념했었는데, 현재 김제.완주 재선 국회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어머니의 뜻대로 잘 성장했지요. 정성을 다하면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어머니를 통해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살아오시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서로 하나가 돼 뭉쳐 있었던 것이 힘이 되었다 생각해요. 저희 삼 형제는 각별했습니다. 어머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지요. 어려서부터 형은 형 역할을 잘 맡아서 이끌어 주었고, 서로 의지하며 작은 일도 무릎을 맞대고 늦은 시간까지 의논하곤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뜻을 모아 함께 했습니다.”
▶ 현재 유족이나 유자녀와 관련된 도움이나 일을 하고 계신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같은 유가족으로서 유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교육감으로서 유자녀 교육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형님께서 전몰 유가족들을 위한 일을 하시기에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드리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유가족이라고 특별하게 유가족만을 위한 어떤 사업은 따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전몰군경 유족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국가를 위해 가족을 잃은 분들인 만큼 자부심을 갖고 사셨으면 합니다. 때로는 서운하고, 원망스럽겠지만 그럴수록 고인의 뜻을 받들어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의지일 것입니다.”
최규호 교육감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리가 매일 편안히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이 있기 때문”이라며“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나머지 몫을 다해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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