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부자목단, 경복궁 정원 수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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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부자목단, 경복궁 정원 수 놓는다
  • 신인식 기자
  • 승인 2022.04.0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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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 납품 건청궁 앞마당 식재

 

장수부자목단에서 생산된 목단이 경북궁에 식재됐다.
경북궁 안쪽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살았던 건청궁앞 정원에 장수부자 목단(대표 장혜주)묘목이 납품되어 식재되었다.

건청궁은 사료에 의하면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1884년 고종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에 의하여 창덕궁 관물헌에 머물다가 1885년 1월 경복궁으로 환어(還御)하였으며, 1896년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기 전까지 건청궁을 주요 거처로 삼았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洋官)이라고도 불렀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가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건물 배치는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복수당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등이 있다.
역사적인 이곳 견청궁 앞 정원에 장수부자목단 생산묘목이 2022년 봄에 납품 되어 식재되었다.
장수부자목단농장에는 장수관내 10여 곳 15만평에 목단묘목이 꽃 색깔 별로 묘목이 재배되고 있으며 종자산업법에 의거 종묘업 생산 등록까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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