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하면 성공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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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하면 성공하라구
  • 엄범희 기자
  • 승인 2010.12.0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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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유행어 중에는 ‘아더매치’ 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은어인데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의 줄임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네 개의 형용사는 모두 비슷한 뜻이지만, ‘치사하다’는 한마디 말로는 부족한 극도의 치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번거롭게 네 개의 유사한 형용사를 연결시킨 것이다.

‘치사하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부끄러운 일이다’ 라는 뜻으로 나와 있는데, 솔직히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다.

보통 내가 ‘치사하다’라는 단어를 쓸 때는 무언가를 충분히 베풀어 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지나치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면, 주변에 나보다 잘난 사람, 높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치사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이웃끼리도 하루에 몇 번씩 “에이, 더럽고 치사해서” 하고 땅에 침이라도 퉤퉤 뱉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게 하고 나면 ‘치사하다’는 말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조금 속이 후련해지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포기하거나 자위하는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

뿐인가. 때로는 “에이, 치사해” 라는 말은 ‘내가 너만 못 하랴, 나도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더욱 분발하게 만들기도 한다.

5년 전, 나는 두 아들과 친구와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친구 낙관이가 독일유학시절 누나처럼 따랐던 어느 독일 가정에 짐을 풀고 우리는 이제껏 말로만 듣던 파리에 갔다.

우리는 렌트한 차를 몰고 독일이 자랑하는 아우토반을 신나게 질주하여 8시간 만에 파리 근교의 휴게실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큰 아들 민이가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민이는 암만 둘러봐도 화장실처럼 생긴 곳이 없다고 했다. 한참을 헤매다가 넓은 휴게실을 가로질러 가서야 겨우 화장실 표시를 찾았는데 반가운 것도 잠시, 입구에 조그만 전화 부스 같은 것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앉아 있다고 했다.

이상도 하지, 저 사람은 왜 하필이면 화장실 앞에서 무슨 표를 팔고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나는 급한 대로 화장실 손잡이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놀라 뛰어나오더니 눈까지 부라리며 뭐라고 핀잔조로 말했다.

한참만에야 나는 그 사람이 화장실 관리인이고, 우리 돈으로 약 500원을 내고 토큰 비슷한 것을 사서 넣어야 화장실 문이 열리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부자가 더 무섭다더니 가난한 나라도 아니고 돈 많은 나라에서 화장실 이용료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갑을 차 안에 두고 온지라 우리는 다시 휴게실을 가로질러 가서 돈을 가져와서야 겨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 상황은 돈 없으면 화장실도 못 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다른 상황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인데, 화장실 앞을 지키고 앉아서 돈을 받다니 그렇게 치사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도시를 다니다 보니 화장실 못지않게 치사한 것은 식수였다. 카페에서 식사를 해도 물 한 컵 공짜로 주는 일이 없고, 작은 물병 하나에 우리 돈으로 4,500원씩이나 받았다.

이러한 사실에 나는 갈증이 절로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치사함의 정수라고 느껴졌던 것은 그들의 언어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길에서 영어로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택시를 타도 영어를 할 줄 아는 기사가 별로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작품에 영어 제목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관광 수입은 수입대로 챙기면서 자기네 나라 오려면 자기 나라 말을 배워 오라는 심산인 것이다. 다행히 카운터에 한국의 모 기업에서 제작한 한글 팜플렛이 비치되어 있어 오천년의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지켜주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치사하다’는 말에는 사실 그 대상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격지심이 담겨 있기도 하다.

유럽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웅대함과 화려함과 정교함, 그리고 아름다움은 나의 짧은 어휘로는 묘사가 불가능했다.

우리의 석굴암과 첨성대 등의 문화유산도 물론 대단히 훌륭한 것이지만 규모로만 따지자면 우리 조상님들에게는 조금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유럽의 거대하고 웅장한 문화유산들을 관람하면서 절로 감탄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차안에서 막내아들 원이가 형에게 물었다.
“형, 파리에도 개선문이 있고 로마에도 개선문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개선문이 없을까?”

민이가 대답했다.
“우리나라에는 대신 동대문과 남대문이 있잖아.”
“아, 그럼 동대문과 남대문이 개선문이야?”

“아니, 개선문은 아니고 그냥 대문이야.”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복한 적이 없고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 역할만 했으니 개선문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던 큰 아들 민이가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큰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개선문이 뭐가 좋아? 힘없는 나라 침략해서 이겼다고 만든 건데. 동대문, 남대문이 훨씬 좋은 거야.
그리고 개선문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나라에 만들어 보면 되잖아.”
원이는 형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치사하면 성공하라는 말 알지? 아빠가 비싼 돈 들여서 이렇게 유럽 여행시켜 주는 거니까 나중에 훌륭한 사람 돼서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오게 하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우리말 배우게 하고, 그렇게 해. 알았지?”

/달리는 희망제조기 송경태

폭풍은 참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한다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
시인, 수필가
장애인 세계최초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 달성(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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