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경제규제 입법에 추경무산까지 정치가 경제에 칼을 꽂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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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 경제규제 입법에 추경무산까지 정치가 경제에 칼을 꽂는 시대
  • 허성배
  • 승인 2016.08.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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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논설위원

한국 경제의 팔자가 기구하다. 겨우 두 세대(世代)가 먹고살 만하다 했더니 저성장 수렁에 빠졌다. 나라가 가야 할 방향 못 정해 기업 손실 커지고 경쟁 도태… 정치가 경제에 칼 꽂을 수도 돈벌이하는 사람들(생산 연령 인구)이 줄어들고 노령 인구는 급증하고 있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뒤 지금까지 의원들이 발의한 경제 및 사회 관련 규제 법안이 259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안 한 건당 여러 건의 규제가 포함되는 점을 고려하면 의원입법 규제의 총수는 700건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올 상반기 675개의 규제를 개선 또는 폐지하기로 했는데 정치권은 두 달도 채 안 돼 정부가 없애려는 것보다 많은 규제를 신설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규제 법안들이 동시다발로 쏟아지게 되면 규제 폭포 같은 상황이 되지 않을지 기업들이 많이 걱정한다”고 전한 경제계의 우려를 소홀히 들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회에 요청한 이번 추경예산이야말로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민생문제가 시급한데도 여·야 3당 지도부가 합의한 22일 예산안 처리를 엉뚱한 청문회에 트집잡아 예결위마저 무산시키므로써 정치가 경제에 칼을 꽂는 그렇지 않아도 국민 경제가 심각한 이 시기에 기름을 붓고있다고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그것 뿐인가. 야당 의원 발의 법안 중에는 기업 경쟁력에 타격을 주고 글로벌 기준에도 맞지 않는 과잉·졸속 규제가 수두룩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이 매년 정원의 3∼5%씩 청년 미취업자를 의무 고용하도록 하는 청년고용 촉진 특별법 개정안은 기업 인사권의 본질과 채용의 수요공급 원칙을 뿌리째 흔들 소지가 크다. 모회사 주식 1% 이상을 가진 주주가 자회사나 손자회사 경영권에 간섭할 수 있도록 한 상법 개정안은 해외 투기자본의 국내 기업 경영권 공략에 악용될 우려를 낳고 있다. 1985년 도입했다가 통상마찰 우려 때문에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폐지한 중소기업 고유 업종 지정제도를 사실상 부활하자는 시대착오적인 법안까지 발의했다.

롯데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처럼 일부 기업의 불법, 탈법 행위는 엄벌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이 국민의 반(反)재벌 정서에 영합하거나 이를 부추기며 기업을 옥죄는 규제 대중연합주의 법안을 쏟아내면 경제의 성장판을 닫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의원입법 규제를 정부가 반대해도 입법 권력을 거야(巨野)가 장악한 여소야대 국회에서 이런 법안이 다수 통과되면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추락시켜 일자리를 줄이는 악순환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규제 영향 분석, 부처의 자체 심사,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같은 다단계 절차를 거치는 정부입법과 달리 의원입법은 객관적인 타당성 검토를 거치지 않아 부작용이 많은 법안이 양산될 위험이 훨씬 높다. 규제를 신설 또는 강화하는 의원입법은 타당성과 부작용에 대한 사전 검증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조속히 국회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진보 정당은 없었다. 유럽의 진보 정치는 인간을 위한 다양한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의 진보 세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파격적인 세제(稅制) 개혁을 통해 분배 정의를 실현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세력은 집권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한국 경제는 성장을 기둥 철학으로 삼아 자잘한 복지정책을 몇 가지 도입한 정도에 그쳤다. 맹목적 추종자들의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크게 보면 모두가 보수 정치의 틀 안에 살았다. 성장의 혜택을 함께 맛보았던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공동 주주들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우리 정치는 저성장의 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허울 좋은 ‘경제 민주화’를 이룬 것도 아니다. 청년들은 더 가난해졌고, 비정규직은 더 늘어났다.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건만 선거철 정치판은 어지럽게 흩어진다. 이렇게 우리 정치도 일본처럼 경제를 장기 불황으로 끌고 갈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미국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판을 뒤흔들고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작다고 하지만 저소득층, 청년층, 백인 중·하위층의 불만과 불안을 정치판에 고스란히 투사(投射)해주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되든 미국은 국제 이슈보다는 내부문제에 더 집중할 것이라는 데에 한국은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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