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변화해가는 장례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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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변화해가는 장례문화 !
  • 신인식
  • 승인 2015.02.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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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식 무주·진안·장수 본부장

  역사의 기록이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을 단절이 아닌 유한한 생명의 관념적 연장상태로서의 사후 세계를 굳게 믿어 왔었다고 한다.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만은 멸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믿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는 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즉 시신의 머리를 해가 뜨는 동쪽에 두며,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몸은 꼿꼿이 펴서 뉘었다. 그리고 시신의 주위에 돌을 둘려서 이를 보호하였고 토기를 부장하여 죽은 뒤의 생활에도 불편이 없게 하려는 노력을 다 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죽은 자를 슬픔 속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춤과 노래, 음악으로 영혼을 위로하며 즐겁게 보내고 일정한 죽음의 의식을 치르며 시신을 무덤에 안치 하였다고 한다. 자손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조상의 영혼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만일 죽은 자가 우발적인 사고나 전쟁에서의 사망 등으로 인하여 장례를 치르지 않고 버려져있다면 그 영혼은 방황을 계속하며 산자에게 어떤 재앙이나 고통을 가져다주어 후손은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는 일은 죽은 자와 관계있는 산자들이 반듯이 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였다.    한국의 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이 남아 있다.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 전라도 지방에 가장 밀집되어있으며 한곳에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群)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오늘 날에 와서 고창에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11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사람이 살다가 중한 병을 앓거나 죽는 일이 있으면 그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집을 지어 살기도하였으며 주거지로 살던 동굴 속이나 자연적인 구릉지 등에 간단한 형태의 구덩이를 파서 흙이나 조개껍질로 덮거나, 혹은 돌을 쌓거나 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가족공동장을 지냈는데, 그들은 10m쯤 되는 나무덧널의 한 쪽에 문을 달아 두고 가족이 죽으면 다른 곳으로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서 덧널 속에 넣었다고 한다. 한 가족을 모두 이런 식으로 장사지내고, 여기에다 사람 수대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넣고, 문 앞에는 곡식을 담은 토기를 매달아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하기도 하였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곽(槨)은 있어도 관(棺)은 없다. 고 했으며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또 임금이 죽으면 옥갑에 넣어 장사 지낸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거상을 하는 데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고 여자는 목걸이나 패물을 떼어 놓는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다섯 달 동안 두는데 오래 둘수록 좋은 것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고인을 기준으로 가족관계를 인식하고 있으며, 조상에 대한 인식과 숭배사상도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남녀가 혼인만하면 벌써 장사지낼 때 입을 옷을 장만한다. 그리고 장사는 금, 은, 돈, 폐백 같은 것을 후하게 써서 장사를 지내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 라고 하였고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고 삼년을 지낸 다음에 길일을 가려서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의 초상에는 삼 년 동안 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 동안 입는다.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 지낼 때에는 춤추고 음악을 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 장사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입었던 의복과 거마를 무덤 곁에 놓아두었다가 장사에 모인 사람들이 나누어 집에 가지고 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인에 예(禮)를 갖추어 치장(治裝)을 한 것으로 보이며, 장례기간이 나타나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적 상장례와 상복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묘제와 더불어 염습이라는 말과 함께 죽은 사람에게 수의개념의 복식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초종이나 상복입는 기간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사회적으로 상장례의 절차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서 토장에서 불교의 영향으로 다비제가 성행하기 시작한다. 고려 시대의 화장제도는 원(元)나라를 통하여 고려말 충렬왕때 안유(安裕)에 의거 송대의 성리학이 처음 들어오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상장례가 전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신의경이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 이재가 집대성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이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가례서가 되어오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1934년 공포된 의례준칙(혼례와 상례, 제례)를 골격으로 전통의례를 간소화 하고 합리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969년에는 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었으며, 1961년12월5일에는 매장 등 및 묘지 등에 관한법률이 제정되었고 2000년 1월 12일에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로 전문개정 후로 2007년 5월 25일에 장사 등에 관한 법률로 전부 개정되었으며 2012년 8월5일에 일부 개정됨으로서 장례지도사가 시신의 위생적 관리와 장사업무를 체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들이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전통문화로 계승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이나 종교에 따라, 또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장례 문화가 발전 정착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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