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주필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일본 히로시마에 79년 전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투하 74만 명을 희생시킨후 일본의 항복으로 8월15일 해방됐다.
세계 2차 대전시 미국이 원폭 투하 대상으로 고려된 일본의 도시는 애초 여러 곳이 있었다. 1945년 5월 10~11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는 니가타,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다섯 도시를 목표로 설정했는데 니가타는 외부 표적과 너무 떨어져 있어 최종 제외됐다.
고쿠라는 청일전쟁의 전후처리 조약이 체결된 도시이고, 나가사키는 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벌의 본거지였다.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현지 시간으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투하됐다. 폭탄은 고도 9,470m에서 43초동안 떨어져 후쿠시마 외과병원 상공 580m 지점에서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엄청나게 밝은 빛과 함께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겼다. 폭 심지 부근 온도는 약 3,000~4,000도에 달했다. 열선과 방사선으로 증발한 사람들의 검은 흔적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원폭으로 히로시마 인구의 약 30%인 7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1945년 말 총 사망자는 16만 6,000명으로 집계됐고 1950년까지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약 20만 명에 이른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족인 이우 공이 대표적이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인 장 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인한 전신 화상 때문에 12세에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으로 발생한 총 74만 명의 원폭 피해자 중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한다. 5만 명은 즉사했고,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했다. 일본에 남은 7,000명 중 현재 생존자는 2,600여 명이다.
1974년부터 2015년까지 기나긴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 국한됐던 무료 전액 치료를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 지원받는 것으로 재판이 마무리됐다.
1971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임기 당시 히로시마를 방문해 피폭자 위령탑에 헌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원폭 기념비에 헌화하면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도 애도를 표했다.
잔인했던 역사의 한 장이 7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무리가 되지않고 있지만 다시는 인류 멸망의 핵전쟁은 이 지구 위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불장난 같은 핵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데 대해 전 세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UN 제재는 날로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도 북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 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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