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한해를 겨울 나무의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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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한해를 겨울 나무의 자세로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4.07.0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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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머언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세월의 마술은 못 견딜 아픔과 수치 마저도 아쉬움과 감미로움으로 둔갑 시키며 아늑한 추억의 베일로 가리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는 언제나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마련이다. 더욱이 엊그제 같은 지나온 일년 간의 삶의 발자취에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당장 지워 버리고 싶은 회한이 생생히 쳐다보고 있어 오히려 까맣게 잊어지기를 소원 하게도 된다.

지나온 계묘년 한 해. 어찌 생각하면 무척도 짧은 세월이었지만 때로는 또 얼마나 지겹도록 지루하고 힘겨웁던 세월이었나. 돌이켜보면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하고 그래서 수많은 회한의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 모두가 다시는 오지 않을 생애의 한토막이며 거기에 쏟아부은 땀과 눈물의 자취이며 허황된 꿈의 껍데기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러나 진실로 감사할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까운 과거 아니 살아온 지난 일년 간의 발자취. 그 부끄럽고 안타까운 흔적이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 아니랴. 자신의 약점을 볼 줄 알고, 인정할 줄 알면서, 정직을 배우고 교만을 벗어나서, 자기 삶의 태도를 겸손하고 신중하게 다스리고, 나아가서 타인의 잘못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알며, 인생의 깊이와 넓이를 그리고 또 긴 안목을 얻게되는 것이 아니랴!
지나온 일년 동안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목표를 세우고 자기 나름의 방식에서 성실이 땀 흘리며 살아왔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이 지나쳐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했을망정, 서로의 손을 잡고 도움이 되고자 애써왔다. 그 누가 자신을 망치기 위해서, 친구와 이웃을 해치기 위해서 고전분투할 만큼 극악하고 어리석을 수 있으랴. 결단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 나름의 사랑하고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서 땀 흘리는 잘못은 없었을까? 오히려 가족과 이웃에게 피해가 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수고해 오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열심을 다해 살고간 자리에는 언제나 회오리 바람이 불고, 돌이켜 고칠 수 없는 아픔이 된서리치는 것을 또 어쩌랴. 그렇다. 그 누구도 잘못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자신 있는 이 위로가 있어 새해를 위한 소망은 언제나 지난해의 잘못을 밑거름 삼아 움트게 된다.
어찌 보면 수없이 거듭되는 해와 달의 숨박꼭질 끝에 일년 열두 달이 가고 다시 세해가 된다는 반복이 더없이 무의미한 것 같지만 흐르는 세월을 토막쳐서 일년 단위로 정하고 12월의 막바지에 올라서 뒤돌아보며 아프게 자신을 반성하게 한 인간의 지혜는 찬양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에 수많은 12월을 거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반성하고 겸손을 배우고 그리고 새로운 발돋움의 슬기를 터득하는 기회를 그만큼 많이 허용받는 것이리라.
가차 없는 반성과 깊은 회한의 한해를 보냄으로써 다시는 오지않을 세월을 무겁고 소중하게 살 줄 알며 겨울 추위 같은 아픈 매를 스스로 때림으로써 아픔과 기쁨의 가치를 깨닫기 위하여 옳은 길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든 지금은 돌이켜 반성할 때이며 온갖 꿈의 허상을 떨쳐 버리고 올 한 해를 위하여 겨울 매를 맛고 선 나무의 준엄한 자세를 배울 때다. 철저한 진통. 철저한 회한. 그 다음에 세워지는 올 한해의 각오가 현실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우치며 눈 바람에 우는 플라타너스 울음을 함께 울어도 좋으리라. 또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고뇌의 이마에 주름살 접어가며 다가오는 겨울의 거리를 방황해도 좋으리라.
요컨대 삶의 의미란 모든 다른 것과 조금도 다를바 없이 가치롭게 살고자 괴로워 하는 그 괴로움의 깊이 만큼 의미도 깊어진다는 것을 혼자서 깨닫는 기쁨을 얻으면 더욱 좋으리라. 그다음에 마주치는 이웃과 따스한 웃음을 나누어 가질 용기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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