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죽도 못 먹던 보릿고개 시절을 뼈저리게 반성해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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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죽도 못 먹던 보릿고개 시절을 뼈저리게 반성해 봐야
  • 허성배
  • 승인 2016.09.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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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논설위원

1964년 남한 경제력은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수출 1억 달러, 1인당 소득 100달러였다. 120여 독립국 중 북한은 40위권, 한국은 100위권 밖의 최빈국이었다. 6·25전쟁 뒤 10년 동안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시행착오를 계속했고, 북한은 김일성 유일 체제를 구축했다.
남한 경제는 미국 원조가 줄어들면서 만성적 빈곤에 시달렸고, 북한 경제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경제의 활성화에 힘입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패전국에서 다시 경제 강국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는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취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쿠데타 이후 1963년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간신히 이긴 뒤 새해를 맞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외화 부족으로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마침내 ‘수출 제일주의’ 결단을 한다. 그러나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결국.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가발산업으로 발전했고, 1969년에는 수출 1위 품목이 됐다. 박 대통령이 독일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독일을 방문, 광부와 간호사 앞에서 눈물의 연설을 하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주고 온 것도 1964년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매국노에다 전쟁 용병 비난을 각오하고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 파병을 결단했다. 당시의 심정에 대해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10년, 1974년 가까스로 북한 경제를 따라잡았다. 남한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김일성은 박정희 암살을 위해 1·21사태 등의 공작을 펼친다.
다시 10년이 지난 1984년 최강국인 미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립 능력을 확보한 셈이다. 세계는 ‘한강의 기적’으로 명명했다. 이렇게 형성된 중산층과 고학력층은 1987년 넥타이부대로 성장하고, 지속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가 됐다. 이처럼 1964년은 대한민국 도약의 원년(元年)이다. 6·3사태를 겪으면서까지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 산업인프라 구축의 종잣돈이 됐다. 
월남 파병은 한 · 미동맹을 진정한 혈맹으로 강화했고, 짧은 기간에 수출 및 국내 산업 발전, 해외 경협 축적 등의 부수적 효과를 올렸다. 파병 세대는 1970년대 ‘산업 전사’로 탈바꿈해 중동의 사막에서 세계인을 경탄시켰다. 젊은이들의 피땀은 세계 경제가 석유파동으로 휘청거릴 때 ‘경공업· 중공업’ 도약을 이뤄내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응답하라 1994’ 드라마가 화제를 모았다.
물질적 풍요,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1994년 대학생들이 40대가 되어 학창시절의 낭만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이들의 꿈과 사랑, 도전과 성취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잊어선 안 될 사람들이 있다. 1960년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야 했던 소녀들, 학업을 포기하고 장시간 노동을 했던 여공들, 독일 탄광과 월남 정글에서 목숨을 걸었던 청년들, 1970년대 사막에서 돌관작업을 마다치 않았던 산업전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응사 세대’의 낭만은 없었다.
1964년의 교훈은 선명하다. 국민은 자식 세대에 무식과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고난을 견뎠다. 지도자는 결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 연설(연두교서)에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닦자”며 “나 스스로 삽과 괭이를 들고 증산과 검약에 앞장설 것”임을 약속하고 국민 동참을 호소했다.
최대한 소통하면서도 필요할 땐 악역을 피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압축 발전의 이면에 적지 않은 희생과 문제점도 있었다. 이들 모두에 대해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공과를 따져야 한다. 한쪽만 부각하는 ‘편향’은 선동이고 왜곡이다.
과거를 잊은 나라에 미래는 없다. 1994년뿐만 아니라 1964, 1974, 1984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1964년의 주역인 080세대 자신의 경험을 자식 세대에 올바르게 전해야 하고, ‘응사 세대’는 그 시대를 살아 있는 역사로서 알아야 한다. 지금의 노사분쟁은 국가경제에 심각한 생사가 걸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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