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 논설위원
4월은 꽃의 달이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꽃의 달이다.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꽃은 4월 한 달 동안에 모두 피고 거의 다 져버린다. 그토록 시끄러웠던 20대 총선도 13일이면 끝이 난다.
세상에서 꽃보다 더 아름답게 왔다가 황홀하게 져가는 목숨도 드물다. 피는 꽃과 지는 꽃을 보면서 한 가닥 유감이 없는 사람 또한 드물 것이다.
틈날 때마다 심산유곡을 찾아들어 개구리·도롱뇽을 잡아먹으면서 오래 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나 독사·지렁이를 사들여 먹는 사람들이라도 문득 눈길을 던져 우연히 시야에 들어오는 꽃에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내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한 걸음만 물러서서 자기 모양을 바라본다면 몬도가네(Mondo Cane)의 추태까지 보이지 않고 오래 살기보다는 순간을 살아도 제 모습을 잃지 않는 꽃처럼 정의로운 사람답게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도 느끼게 되리라!
그리고는 지금의 자기 모습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쌍한 몸부림인가를 부끄럽게 느낄 수도 있으리라. 만약 한줄기 눈물까지 흘릴 수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구제 가능한 수준의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이리! 슬픔이나 고독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다. 슬퍼해야 할 일에 마땅히 슬퍼할 줄 알고 고독할 때 고독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사람다움이며 양심에 순종하는 갸륵함일 것이다.
가신 이들의 허덕이는 숨결로 곱게 씻긴 꽃이 피었다.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꽃”이라 제목 붙인 미당(未堂)의 시구이다. 정녕 피어 흐드러지고 비바람에도 황홀하게 질 줄 아는 꽃의 생리는 분명 자연의 섭리지만 인간의 관여가 없을 수 있는가. 비록 해마다 반복되는 섭리라 할지라도 그 섭리를 타고 인간의 역사는 이루어져 왔지 않는가?
모든 꽃은 저 홀로 무심히 피고 지는 것이 아니라 가신 이들의 더운 숨결과 목청과 몸짓대로 피는 것이리. 정녕코 우리의 산하에 피고 지는 꽃들도 5천 년 우리 역사의 고통스럽던 시기마다 꽃같이 숨져간 무수한 충심(忠心)들이 다시 살아오는 그 모습임이 분명하다. 꽃이 지는 가지 아래서 왠지 가슴 가득히 슬픔은 차오르고 슬픔의 물 위에 꽃잎은 낭자하게 떨어져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는 우리의 핏줄을 타고 실핏줄을 타고 전신으로 흐르는 무엇을 느낄 것도 같다.
올해 4월은 유난히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우리 곁에 꽃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꽃을 볼 수 있는 특혜와 교훈의 달이기도 하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국가안위를 위해 꽃다운 단심(丹心)을 보여 준 수많은 애국 선인들의 공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신 이들의 헐떡이는 숨결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자기 모습을 돌이켜보는 슬픔과 고독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봄직도 하다. 그리하여 56년 전의 외침! 우리의 혈관에 새로운 역사의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저 4월 19일의 함성의 의미도 새롭게 되새겨 봄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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