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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김씨(金寧 金氏)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 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파조(派祖) 김준(金遵)을 배향하는 봉암사(鳳巖詞)
icon 김민수
icon 2014-05-17 08:16:56  |   icon 조회: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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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김씨(金寧 金氏)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 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파조(派祖) 김준(金遵)을 배향하는 봉암사(鳳巖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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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全羅南道) 고흥군(高興郡) 과역면(過驛面) 가산리(佳山里)의 김녕 김씨(金寧 金氏)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 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파조(派祖) 김준(金遵)을 배향하는 봉암사(鳳巖詞)는 선조(先祖)나 선현(先賢)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사우(祠宇)로서 단종조에 충절을 지킨 만지당(晩池堂) 김준(金遵)을 사당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位牌)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벽(主壁)으로 하고 그의 증손이며 사헌부 지평을 지낸 김원경(金元慶)의 아들인 참판공(參判公) 김구룡(金九龍)을 배향하기 위해서 건립하였다. 봉암사(鳳巖詞) 오른쪽에는 이여재(二如齊)가 있다. 단종(端宗)은 조선국(1393-1897) 5대 국왕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님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 김녕 김씨(金寧 金氏) 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파조(派祖)인 만지당(晩池堂) 김준(金遵)은 단종 복위를 모의한 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의 사육신을 지도하였다. 1826(순조26)년 고흥(高興) 인 흥양(興陽) 지역의 사림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봉암사는 단종(端宗)의 실권을 계기로 김준은 흥양(興陽)으로 내려와서 과역면 가산리에 정착하였다. 참판공(參判公) 김구룡은 김준의 증손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서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봉록되고 그 후 여진족을 토벌하여 정난공신에 오른다. 이후 직위는 병조 판서에 올랐다. 김녕 김씨(金寧 金氏)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 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파조(派祖) 김준(金遵)을 배향하는 봉암사(鳳巖詞)는 1868년 서원 철폐 때에 헐리고 여러 변천사를 겪다가 1988년 사우를 다시 세워 현재에 이른다. 설화에 의하면 사우를 건립하려고 지관이 돌아보고 있을때 봉황(鳳凰)이 날아가다가 산봉우리에 앉더니 봉황을 닮은 바위로 변했기 때문에 그 곳에 봉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김녕 김씨(金寧 金氏) 관조(貫祖) 김시흥(金時興)의 20세손이며 백암공(白巖公) 김구정(金九鼎)의 후손인 김술(金述)을 봉암사에 배향하여야 한다. 1639년 9월 7일 충청 수사(忠淸 水使) 김술(金述)이 치계하기를 “보령(保寧)의 어부들이 눌이도(訥伊島)에 갔다가 갑자기 적선(賊船)을 만나 배와 의복, 양식 등을 모두 약탈당했는데 어부들을 섬 속에 버려 두고 가서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도적들은 모두 청의(靑衣)를 입고 있었는데 작은 모자를 쓰기도 하고 머리를 싸매기도 하였으며 한선(漢船)인지 적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합니다.”하였다.1640년 11월 2일 인조가 김술(金述)을 전라 우수사(全羅 右水使)로 삼았다.











김시흥(金時興 1090 ~ ?) 고려국 중기 문신, 김녕 김씨 관조, 호는 둔촌(鈍村) 또는 송악(松嶽)이며 신라국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고려국 선종 7년 1090년에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고려국 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병부 시랑 동북면 병마사(兵部 侍郞 東北面 兵馬使)를 지냈다. 묘청(妙淸), 조광(趙匡), 류참(柳旵) 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정당 문학 광록대부 평장사(政堂 文學 光祿大夫 平章事)에 이르렀고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녕 김씨 관조 김시흥(金時興)의 묘는 개성 송악산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어 2013년 4월 6일 김녕군(金寧君) 김시흥(金時興)의 종손인 영돈령공 김준(金遵)의 묘가 있는 전남 고흥군 과역면 가산리에 조성하였으며 전남 고흥 봉암사, 전북 익산 오강서원(五岡書院), 충남 아산의 도산사(道山祠) 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김준(金遵 1409 ~ ?) 조선국 전기 문신, 자는 응원(應遠) 호는 만지당(晩池堂),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영돈령공파 파조이다. 신라국 경순왕(敬順王)의 4남(四男)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烈)의 9세손인 고려국 문열공 김시흥(金時興)의 10세손으로 한성부 필동에서 출생하였다. 1426년 세종조에 등과 후 벼슬은 청현관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兵曹 判書),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단종 복위를 모의한 사육신(死六臣)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보종(保宗)하라는 뜻에 따라 흥양(興陽)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후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했다는 소식을 듣고 월악산(月嶽山)에 들어가 통곡(慟哭)하며 방상 3년(方喪 三年)하였다. 세조(世祖)가 좌의정(左議政)에 임명(任命)코자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충절과 의기를 몸소 실천하였다. 후손들에게 9가지 부끄러움을 경계하는 잠언서인 9치잠(九恥箴)과 학문을 열심히 하고 주색을 멀리 하라고 당부하는 계자문(戒子文)을 지어 향인과 후손들에게 충의사상을 가르쳤다. 전남 고흥 과역 가산 봉암사와 전북 익산의 오강서원(五岡書院)에서 배향되고 있다.
2014-05-17 08: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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