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사회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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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사회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12.2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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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유)지성주택건설 회장

“인간의 행복은 검소한데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데서 생깁니다. 자기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근면, 성실하게 일하면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애향심과 궂은일을 마다않고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 그리고 절제된 생활에서 배어나온 충효정신으로 주변의 사표가 되고 있는 김영구 (유)지성주택건설 회장(69).

김영구 회장을 가리켜 주변에서는 ‘불도저보다 강한사람’, ‘의리의 사나이 돌쇠’, ‘정이 많고 눈물이 있는 사람’, ‘불가능을 모르는 긍정적인 사람’이라 부른다.

그가 어려운 이웃과 사회의 그늘진 곳에 빛과 소금이 되어 평생을 살게 된 계기는 고교 1년 시절 우연히 고아원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청소년 적십자 단원으로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추운 날씨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맨발로 리어카를 밀고 가던 원생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고등학교 3년 동안을 맨발로 다닌 것은 그가 사회봉사활동을 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김영구 회장의 기업경영철학은 ‘건강한 사회 건설’이다. 나 자신보다 우리를 위해,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해 온 참경영인이요, 실천주의자다.

그래선지 자신에게는 가혹할 만큼 검약하면서도 남들에게는 후덕한 사람이다.

자신은 항상 허름한 구두를 신고 다니며 뒤 굽과 앞창을 수없이 갈기도 했지만 명절 때가 되면 직원들에게 슬그머니 구두티켓을 쥐어주곤 했다.

그동안 기업가로 지역발전에, 정치가이자 가장으로 충효정신에, 사회봉사자로 희생정신에 헌신하면서 받은 훈장이나 표창은 500여개가 넘는다.

대통령 훈장을 비롯해 각종 상패가 지성빌딩 6층 사무실 한 칸을 가득 매우고 있는 광경은 그가 지역사회 발전은 물론 사회봉사로 한 평생 살아온 흔적이며, 그의 인생무대를 축소해 놓은 공간이기도 하다.

김영구 회장의 남모르는 선행 뒤에는 잔혹한 왜정치하에서도 한글학원을 설립해 우리글을 깨우치게 하고 해방 후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항상 약자의 편에서 인명과 재산을 구했던 선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유내강(外柔內剛)’형으로 인간미 넘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타의 귀감이 되고 있는 그의 삶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학창시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

전주공고 재학시절,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주위의 신뢰와 성실함, 단정한 몸차림 등으로 귀감이 됐다.

김영구 회장은 전주공고 총 학생회장 뿐만 아니라 적십자사 대표와 전북총연합회장을 맡으면서 각종 봉사활동 등에 리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김영구 학생회장은 유도로 단련된 우람한 체격에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정감이 넘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다.

동료학우들 속에서 교풍을 바로 세우는 선도적 역할을 비롯해 4.19의거 당시 시위의 선두대열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불의를 뿌리 뽑기 위해 외치는 ‘정의파’였다.

▶건설업에 대한 집념과 추진력
김영구 회장은 일에 대한 집념과 추진력이 남다르다.

대학과 군복무를 마치고 건설업에 뛰어들면서 신의에 바탕을 둔 관리능력과 운영방침, 실적에 대한 칭송 및 찬사 등은 사업발전에 영양제가 됐다.

어떤 일을 맡든 계획하고 시작하면 끝나는 순간까지 몰아쳐서 소기의 목표을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다. 주택 건축현장에서 밤을 세워가며 지휘 감독하는 추진력은 그만의 노하우다.

그는 1983년부터 주택건설을 시작해 88올림픽이 끝나고 효자동 대규모 임대아파트와 인접지역 쌍용임대주택을 건설하면서 힘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업다각화에도 관심을 가져 시멘트, 석유 가스충전 유통사업에도 진출, 도내 중견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새마을 운동 뚝심으로 명패 지켜

새마을 운동의 평가가 대단했던 시절이 지나고 그 빛을 잃어가면서 새마을 운동 간판이 바뀌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의 맥이 끊어지면 안 되고, 민족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김영구 회장은 명패를 지켰다.

당시 새마을 운동 전북지부 회장을 맡았던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꿋꿋하게 선두에 서서 새마을 운동을 지원했다.

우수새마을운동 지도자를 발굴해 표창하고 부상을 주는 등 사재를 털어 후원했다. 그의 이러한 뚝심이 버팀목이 되어 1995년 전북도민의장(새마을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소년소녀 가장 등 어려운 이웃에 헌신
김영구 회장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불우한 소년소녀 장학금지급이나 노인정 경로행사 같은 물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과 병행해서 비행청소년의 잘못된 행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수시로 그들과 어울리며 애로사항을 해결해줬다.

흔히 돈 좀 있다 하는 기업인들이 얼마간의 돈을 기부해 본인의 이름을 알리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교감을 통한 선도는 진실로 관심이 없으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우리사회가 전과자에게 아예 발 디딜 틈도 주지 않는 냉소적인 모습을 취하는데 반해, 전과자들에게 동등한 사회인으로서 활동 할 수 있는 발판인 취업에 앞장섰다.

혹시나 적응치 못할까 하는 염려에 수시로 방문해 격려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소년에겐 남다른 관심
김영구 회장의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남달라 청소년 단체 지원은 물론 청소년 육성에도 열정을 베풀었다.

그의 소망은 미래의 주인공들이 맑고 밝고, 바르게 성장해 국가와 민족의 초석이 되고 사회의 밑거름으로 성장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2세들의 바람직한 성장을 바라고 몸을 던져 참여하는 그의 모습은 주변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연케 했다.

우전중, 근영여중, 서전주여중, 전주중앙여고, 성심여고, 우석여고, 전일여고, 동암고, 전주공고 육성회장을 맡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나 그의 손길이 머물렀다.

동신학원 이사장, 전주시 교육청 교육행정 자문위원, 전북 청소년적십자 위원장 등 전북 청소년 육성의 짐을 지고 청소년 교육에 정열을 바친 것은 그의 집념의 결정체였다.

그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진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올바른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청소년의 몸과 정신이 건강할 때 나라의 미래는 밝고, 반대로 청소년이 병든 사회는 희망이 없는 만큼, 어느 특정인이나 단체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도의원 시절, 역경 속에서도 원만한 의정활동 펼쳐
사람이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섭섭해 다시 만나고 싶은, 그래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유쾌해지는 사람이 있다.

제5대 도의원 시절, 당시만 해도 중앙?지방 할 것 없이 정치적인 격동기였다.

도의회와 집행부는 물론 도의원 상호간에도 여?야간, 계파 간 갈등이 끊일 날이 없었다.

더욱이 정원 50여명 가운데 여당 의원은 김 회장과 여성의원 1명뿐이었다.

그는 야대여소(野大與小)의 도의회에서 고비마다 능란한 수완으로 야당의원들을 설득해 원만하게 협상을 타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도청이나 도교육청이 의원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당할 때면 언제나 회의를 마친 뒤 교육청 좌석부터 찾아 위로 격려하고, 도청 석에 들러 위로해 주는 단 한명의 여당으로서 자상함을 보여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팔복동 공단을 세우는데 핵심역할을 했던 김용진 의원(5대 민의원)때부터 청년회원으로 공화당에 입당해 40년 넘게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으로 남아있다.

김영구 회장은 공화당을 거쳐 5대 전북도의원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처럼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도록 희생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지도자다.

▶이타정신에 배인 이웃 사랑
김영구 회장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세운 3대 원칙을 지키고 있다. 재산이 모이면 1/3은 가족 등을 위해, 1/3은 사회봉사를 위해, 1/3은 기업에 투자하겠다고 맘먹었다.

그는 1989년 ‘스카우트의 메카’라고 불리는 한국보이스카우트 전북연맹의 수련터인 송광훈련장에 ‘동심당’을 지었다.

항상 청소년을 이해하고, 2세들의 성장을 돕고, 소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들을 의논하고 수행하는 본산인 ‘동심당’의 완공은 전북연맹 발전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의 깊은 뜻을 기리기 위해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는 ‘무궁화 은장’을 수여하고 공을 찬양했다.

1991년 강원도 고성 잼버리장에서 개최됐던 세계잼버리 대회 때에도 김 회장은 장남 지성군과 함께 보이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참가했다.

김영구 회장은 청소년 육성재단에 15억, 전북대 1억, 원대 3억 5천, 전주대 1억, 전북야구협회 3억 등 모두 75억여원을 헌납했다.

그는 국제라이온스협회 355-E지구 전북지부 총재를 비롯해 한국자유총연맹 전북지부회장, 전북지방경찰청 범죄예방 봉사위원, 새마을운동 전북지회장, 전북애향운동본부 이사, 한국청소년연맹 운영위원장, 전주보호관찰소 운영위원회회장, 청소년적십자 위원장 등 수많은 사회봉사단체 중책을 맡으면서 지역사회의 밝은 빛을 비춰주고 있다.

▶효성효심, 옛 스승에 대한 존경심 각별.
김영구 회장은 매회 스승의 날을 맞아 옛 스승을 한자리에 모시고 감사의 안과 선물로써 보은의 뜻을 표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미미하지만 고인이 된 선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조석으로 영정 앞에서 문안을 여쭙고, 큰일 있을 때마다 계획 중인 서류를 펼쳐놓고 고하는 것도 그의 일과 중 하나다.

홍수자 여사와의 사이에 4녀 1남을 두고 있다.

▶프로필
△1941년 정읍 태인 출생 △1999년 전북대 임학과 명예졸업 △2002년 원광대 명예 경영학 박사 △지성주택건설 회장 △비즈니스클럽 회장 △전주공고 총 동문회장 겸 장학재단 이사장 △(재)청소년 육성재단이사장 △(재)호남오페라단 이사장 △전주 상공회의소 상임위원 △전북 지방경찰청 행정발전위원 △(사)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 △(사)전북 의정회 수석부회장 △한국미래문학연구원 이사장 △법무부 갱생보호회 전주지회장 역임 △국제라이온스 355-E(전북)지구 총재 역임 △새마을 운동 전북지부회장 역임 △대한산악연맹 전북연맹 회장 역임 △(사)전주 풍남제전위원회 이사장 역임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 상임위원및 총동문회장 역임 △광산김씨 전북 종친회장 역임 △(사)한국청소년전북 연맹 총장 역임 △16대 국회의원 △대통령 포상, 국민훈장 석류장./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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