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규 논설위원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어느 일본인 집에 식모살이 10대 어린 소년가 있었다. 소녀는 주인집 애기를 업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극장 사장은 소녀의 노래 재능을 간파했다.
그리고 소녀에게 “얘야 너, 가수해도 되겠다.”라며 응원했다. 그는 “영화 필름을 실은 배가 제주도에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 상영을 못한단다. 그때 너를 무대에 세우겠다.”라고 소녀에게 약속했다.
이 가수가 바로 훗날 조선 땅을 눈물로 적신 이난영이다. 당시 국내에는 최고의 가수인 고복수, 남인수 등이 소속된 오케레코드사가 있었다. 이 회사가 1935년에 공모한 ‘제1회 향토 노래 현상 모집’에서 ‘목포의 사랑’ 가사가 당선됐다.
오케레코드사는 조선인들의 서러움을 건드리기 위해 노래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꿨다. 당초 이 노래를 부를 가수는 고복수가 1순위였다. 그러나 목포 출신 가수가 불러야 인기몰이가 된다는 전략으로 이난영이 낙점되었다.
이난영은 간드러진 목소리 창법을 구사하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그는 10대에 ‘목포의 눈물’이 히트하면서 최고의 가수로 등극했다. 1969년 ‘목포의 눈물’을 기념하는 ‘이난영 노래비’가 목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유달산에 세워졌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호남을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곳은 야구장밖에 없었다. 한(恨) 서린 외침이 ‘목포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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