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의 2덕(德), 황희와 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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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의 2덕(德), 황희와 백장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4.08.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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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수 최훈식

 

전북특별자치도 동부 고원 산악지대에 자리한 장수군은 청정지역이자 금강의 발원지로, 수려한 산세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흘러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이 주요 인물의 유배지가 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장수군을 빛낸 인물로 2덕(德)으로 기려지는 백장선생과 황희선생은 장수로 유배 온 대표적 인물이다.
장수군 2덕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방촌 황희선생은 청렴을 대표하는 인물로 장수황씨가 배출한 위인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 문신으로 5명의 임금(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을 모신 정승(정승기간 24년)인 황희선생은 본관인 장수로 유배되었고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유배 당시 2덕인 백장선생과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장수군을 대표하는 2덕의 다른 인물인 백장선생은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정몽주와 더불어 조선 초기 수절신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백장선생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장수군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연구용역을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를 약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齎), 시호는 충숙(忠肅)으로, 백장선생의 성격은 순정하면서도 기개가 있고 침착하며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면모는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역리학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다고 한다. 공손하고 은혜로우며 절의를 지킨 충신이었다는 기록도 확인되었다.
어릴 적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공민왕 때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고 원나라 유학시설 제과에 장원급제한 후 고려로 돌아와 광정대부·이부전서·보문각 대제학 등의 중요 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으로 이주하여 후학양성에 몰두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학덕을 겸비한 백장선생을 조정으로 나오도록 불렀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왕명을 거역한 죄로 그를 충청남도의 해미로 유배보냈다.
해미에서의 9년간의 귀양살이 후 이번에는 태조의 아들 태종(이방원)이 조정에 나오도록 특명을 내렸다. 백장선생이 다시금 거절하자 다음 유배지는 해미보다 훨씬 먼 장수군이 되었다.
1405년(태종5년). 백장선생의 나이 64세일 때이다.
당시 장계현으로 유배 온 백장선생은 지금의 장계면 금덕리 호덕마을에 터를 잡고 계남면 침곡리에서 학문연마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이때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계남면 방아재 옆의 청심정이다.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굳은 신념하에 장수에 머문 13년간의 유배 생활 중 백장선생은 장수군 학문발전에 모든 열정을 쏟아낸 듯하다.
장수에 살던 많은 학자들이 고명한 백장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하였고 이를 통해 장수지역 학문이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백장선생은 이후 1418년(세종즉위년) 사망하였다.
백장선생의 묘소는 장계면 금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01호(1999.4.1.)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장수군의 “2덕”은 장수군을 빛낸 인물로 추앙되어 왔다. 하지만 백장선생은 그의 화려한 생애에 비하여 황희선생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백씨 성을 가진 사람의 본관은 수원백씨가 유일하다. 몇 해 전 기준으로 약 35만명의 백장선생의 후손이 생존해 있다. 우선 이들에게 선조인 백장선생의 훌륭한 업적을 알리고 그의 묘소인 장수를 찾을 수 있도록 홍보가 필요할 듯하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백성을 올바로 인도하는 데 정치적 술수로써 하고 질서 잡는 것을 형벌로 한다면 백성은 모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인도하기를 덕으로써 하고 백성을 바르게 하는 데 예를 가지고 한다면 백성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됨됨이를 가리키는 “덕”을 시사하는 장수군의 2덕 위인들이 유독 빛나는 듯하다.
장수군의“2덕”, 백장선생과 황희선생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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