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문이 그린 어긋 장단에 춤추는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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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문이 그린 어긋 장단에 춤추는 코끼리
  • 조병현
  • 승인 2013.07.2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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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철학자 중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철학의 논지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다. 필자가 짧은 소견으로 두 사람의 깊은 철학의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기엔 부족할 수 있겠으나, 표면적으로 요약되는 주장으로 봐선 둘은 최소한 반대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현상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은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각자 자신만의 지식을 투영한 판단을 함으로써 오류를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둘 다 진실은 아닐 것이다. 즉,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진 격이다. 단언컨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만진 부분만으로 완전한 코끼리를 그려낼 수 없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혹 어떤 이들은 각자가 만진 부분을 모으면 완전한 코끼리를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느 장님도 자기가 만진 부분이 코끼리의 어느 부분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요, 완전한 코끼리를 본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력이 교만해지거나 부패해지면 해괴한 코끼리들이 등장해 국민들을 현혹시킨다.

 ■넘치는 세일러문과 해괴한 코끼리
 세일러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그 여주인공이 외치는 말이 있는데, “정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이다. 어린이 만화엔 대개 선악이 분명하고 따라서 죄를 지은 악한 자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받는 게 당연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그럴까라고 묻는다면 답은 ‘글쎄요’다. 

 12·12사태를 일으키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출범한 5공화국이 내건 슬로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의사회구현’이었다. 이후에 모호한 세일러문들이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세일러문의 칼날에 희생됐다. 이명박 정부가 내건 슬로건은 ‘공정한 사회’였다. 그렇다면 과연 공정한사회가 이룩됐을까? 4대강사업에 예산이 편중돼 복지예산은 소외됐고 소수의 기업들만이 잔치에 참여했다. 또 낙수효과를 운운하며 부자감세와 친재벌정책을 펼쳤으나 수로는 막혔고 부자들은 물을 저수지에 가뒀다. 그가 만든 세일러문의 칼날은 중소기업과 서민들을 향했고 수많은 이들이 불경기를 탓하며 희생을 감수하며 살았고 그렇게 공정한 사회는 막을 내렸다. 박근혜정부가 들고 나온 세일러문은 경제민주화다. 과연 막힌 수로를 뚫고 저수지에 갇힌 물을 흐르게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긴 한데, 이 정부 하는 행태로 봐선 큰 기대감이 안 든다. 바로 국론의 분열이 그렇다. 자기 앞에 큰 감 놓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는 듯하다. 노무현정부에서 있었던 남북정상의 대화록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공개됐다. 귀추가 주목됐던 NLL과 관련해서 국민들의 53% 이상이 노전 대통령이 포기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24%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한국갤럽)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부관참시에 앞장섰던 유수의 언론들은 논조를 바꾸거나 입을 닫았고, 세일러문은 지금 악당이 누군지 몰라 악당을 찾기 위해 허둥대고 있다. 특히, NLL은 국가영토와 관련된 문제이면서 남북문제와 나아가 남북통일에까지 연결돼 있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일로 대내적으로 국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이해가 얽히면 국가 외교문서도 언제든지 아무 때나 공개될 수 있는 나라로 여겨지게 됨으로써 국가의 대외신인도는 추락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장단에 춤추는지도 모른 채 세일러문이 그리는 해괴한 정의의 코끼리를 보고 있다. 혹자는 긴 코를 만지며 다리가 다섯 개로구나, 혹자는 큰 귀를 만지며 날개가 있구나, 혹자는 상아를 만지고 이빨하나가 이렇게 크다면 키가 수십 미터는 되겠구나 할 것이다.
 마이클 샐던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통해 정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며 찾아가고 있으나 확실한 결론은 없다. 또 이를 반박하며 쓴 이한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라는 책도 있다. 정의를 말하면서 이 둘의 주장은 왜 서로 다를까, 이 두 장님은 과연 코끼리를 보았을까? 학자들도 이렇게 서로 다르거늘 하물며 어느 누가 대한민국의 정치인에게 정의를 기대하겠는가?
 누군가가 필자에게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개그맨의 유행어로 대신하고 싶다. “그때그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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