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로 변한 판결문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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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로 변한 판결문을 보고
  • 백승록
  • 승인 2013.05.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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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져 내리는 봄 햇살을 밟고 거리로 나섰다. 훈풍에 쫓기는 낙화가 인도 구석으로 어지럽게 내몰린다. 순간, 시야엔 누렇게 탈색된 접쳐진 폐지조각이 담벼락에 떨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무심코 펼쳐 보았다. 그런데 뉴스나 신문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 중요한 판결문을 누가 버린 것일까. 한줌 폐지로 변한 판결문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친 협으로 기소된 한 소녀가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법정 안은 준엄하고 조용했다. 잠시 후 법정으로 중년 여성 판사가 들어왔다. 무거운 보호처분을 예상하고 움츠려 있는 소녀를 향해 판사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그리고 날 따라 힘차게 외쳐보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소녀는 작은 소리로 ‘나는 이 세상에서…’라며 입을 열었다. 더 큰 소리로 따라 하라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큰 목소리로 따라하던 소녀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고 외칠 때 어머니를 쳐다보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녀는 14건의 절도와 폭행죄를 저질러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 될 판이다. 그런데도 판사는 외치기로 판결을 내렸다.
  소녀는 작년 초까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반 상위 성적으로 간호사를 꿈꾸는 발랄한 학생이었다. 귀갓길에서 남학생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면서 그만 삶이 비뚤어진 것이다. 후유증에 병원 치료도 받았다. 이런 불행으로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 소녀는 학교를 겉돌았고 비행소년들과 어울려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판사는 참관인들 앞에서 말을 이었다. “이 소녀는 가해자로 법정에 왔습니다.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의 잘못된 책임이 있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우리 자신입니다. 소녀가 이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우리가 다시 찾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판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소녀를 법대 앞으로 불러 세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요. 그건 바로 너란다.” 그리고는 두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 주고 싶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정도 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다.”
  서울 가정법원 모 부장 판사가 내린 판결문의 일부이다. 이례적인 불처분 결정으로 참여관과 실무관 그리고 방청객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사건이다.
  난 이 글을 읽는 순간 내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그래야 범죄의 예방효과가 있다. 물론 청소년범죄는 처벌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교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전자의 사건을 맡은 판사는 죄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판결한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 비행과 탈선은 양적인 증가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날로 흉포화, 지능화, 집단화 되어가고 있다. 청소년 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사회에 만연안 배금주의 사상,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과소비의 향락문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입시경쟁교육을 배놓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은 이런 경쟁 속에서 소외되는 현실, 이를 도피하기 위해 청소년들은 오히려 병든 문화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비행과 범죄의 길은 열리고 기생세대의 몰이해와 무관심, 비정함은 청소년의 비행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따라서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청소년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교과서의 개편과 함께 가정, 학교, 사회의 따뜻한 보살핌과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백승록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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