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를 타락 시킨 죄
상태바
젊은이를 타락 시킨 죄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3.01.05 15: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성배 주필

 

철학이 무엇입니까? 한 학생이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바디우에게 묻자 바디우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 철학이라는 바디우의 답이 생뚱맞게 들리지만 철학적 세계의 문을 연 소크라테스가 고대 폴리스 아테네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죄명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라는 점을 상기하면 청년, 타락, 철학이라는 낯선 단어의 조합이 뭔가 진지한 숙고를 요청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 시대 최고의 부와 문명을 누리고 있던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탐색할 때 현대 정치학에서도 항상 다시 살펴보는 놀랍도록 정치한 정치 사회제도를 발명하고 실제로 운영한 문명이었다. 이 놀랍도록 시대를 앞선 문명은 소크라테스가 이 도시국가의 정치 사회체제 그리고 담화의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면서 근원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전쟁의 승리와 놀라운 정치·사회적 성취에 대한 근본적 해체 작업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정의의 담지자로 자처하는 당대의 지식인과 지배자의 허구와 허위의식을 뿌리로부터 무너뜨렸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혹은 변증법은 새로움을 갈구하는 젊은이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고 아테네 정치 사회체제 ‘너머’를 사고하는 동력과 계기를 촉발했다. 주류적 규범과 현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억압된 진리를 해방하려는 사유는 곧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면에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이 분명하다. 소크라테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실천은 향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지성의 터전을 닦은 플라톤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실천과 사형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철학의 부재, 청년문제를 다룰 때 한국사회가 반드시 살펴 보아야 할 질문이다. 586이라 불리는 기성 정치세력이 있다. 이들은 단지 세대로만 분류되는 개념은 아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체제변화에 집중해서 헌신적으로 실천했던 일군의 정치인들을 비판적으로 부르는 용어이다.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정치인 안철수나 이재명은 그래서 586이라 불리는 정치집단의 집합에는 속하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의 이 586을 향한 비판은 그래서 타락했던 청년들에 대한 비판이다. 586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다양하다. 그중에 가장 뼈아픈 것은 이들 586이 이제는 그들의 비판정신과 체제 초월적 실천력이 고갈되고 체제 내 기득권 세력으로 흡수된 ‘혁명성이 고갈된 꼰대’라는 지적이다. 이런 비판은 보수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회운동의 후배들로부터도 볼멘소리로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청년들의 정치 사회 참여가 부족하고 선거 투표율이 저조하다는 걱정은 지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하나의 기우가 되었다. ‘이대남’이라는 키워드로 폭풍처럼 등장한 20대 남성은 20대와 30대의 지지가 대통령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는 열쇠로 인식되면서 한국 정치무대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대남’의 등장은 문재인 정부 초창기로부터 동력을 확대한 페미니즘 운동의 반동이라는 측면을 강하게갖고 있고 페미니즘 운동에 상대적으로 억압된 ‘이대남’의 분노를 간파하고 정치 동력화 한 국민의힘 청년대표 이준석 그룹의 역할에 기인한다. ‘이대남’의 등장은 청년 정치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이들이 제시한 ‘공정’이라는 정치 사회적 의제는 선거 내내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여성가족부를 해체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공약과 현실적 실행도 ‘이대남’의 정치적 반동 형성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지시하는 최소 공약수인 공정에 대한 요구는 정의와 평등, 그리고 분단의 극복과 평화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 경제적 요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준석 대표의 몰락과 함께 변절과 침묵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전혀 타락하지 않았던 ‘이대남’들의 분노의 표출은 지도부의 정치적 몰락과 체재 친화적인 자기 의제 속에서 이미 자신의 정치 사회적 동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전혀 타락하지 않은 ‘이대남’들의 정치가 한반도의 새로운 정치 사회적 동력, 시대를 ‘너머’ 고난의 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타락한 청년들의 역사에 기입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체제 내에 분단이라는 깊은 결핍의 상처를 내재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한반도 정치를 끊임없이 좌초시킨다. 한반도 정치는 남북 간의 골육상쟁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를 내장한 한국 정치 내부의 상처로 끊임없이 정상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발전을 변질. 왜곡시키면서 우리의 정치 사회의식을 비극적 한국전쟁의 현장에 묶어두고 있다. 이 분단의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친일의 유령, 식민사관의 유령, 군사독재의 유령들이 자유와 연대의 이름으로 출몰하고 있다. 증오의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향락을 제공 받는 분노의 정치가 한국 정치내부에 하나의 강력한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2023년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아직도 전쟁 상태가 멈추지 않은 분단의 현장에서 젊은이들이 친일의 안일함, 군사독재의 향수를 달콤한 모성의 품으로 향락하는 현실을 단호히 거부하는 철저히 타락한 철학적 수행의 길로 들어서길 기대해 본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