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새수첩을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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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수첩을 쓰면서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2.12.2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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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수첩은 우리의 필수품이다. 나도 오래전부터 수첩(手帖)을 애용하고 있어 해마다 수첩을 옮겨 적으며 여러가지 감회(感懷)에 젖곤 하는데 이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새 수첩을 마련해 마치 경건(敬虔)한 의식을 치르는 마음으로 임인년의 헌 수첩에서 새 수첩으로 일상에 필요한 것을 골라 옮겨 적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전화번호가 적힌 인명록(人名錄)인데, 이를 고스란히 옮겨 적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과수(果樹)를 가꾸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 가지치기(剪定)이다.
쓸데없는 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진짜 중요한 몇 개의 가지마저 관리가 소홀(疏忽)해져서 나무 전체가 부실해지게 된다.
인간관계에서도 이 가지치기라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도 많이 꺼내 봤기에 겉장이 너덜너덜해진 지난해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사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가운데서 썩어 가는 가지와도 같은 관계라든지 없어도 좋은 가지들을 큰마음으로 싹둑 잘라 버리고 새해의 새 수첩에 푸르고 무성한 잎을 피울 가지만을 골라 그 이름들을 정성스럽게 적어 본다.
어느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한 사람이 기억하는 인명이 최고 5,000명이며, 평균 2,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 몇 천명의 아는 사람 중에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들어 있을 테고, 언제 봐도 웃음이 도는 즐겁게 해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인간의 모든 일이 이 만남으로 시작된다. 불교에서 잘 말해 주는 억겁(億劫)의 인연이다. 보고 싶고 또 마주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좋은 인연’일 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연(惡緣)’일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런 인연들이 쌓여 ‘고리’라는 것을 이루게 된다.
‘예언자’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칼릴 지브란’의 부러진 날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생의 고독이란 대양 위에 떠 있는 한 고도(孤島)이다. 그 섬의 바위들은 희망이요. 수목들은 꿈이며. 꽃들은 고독이요. 시내는 바로 갈증이다. 그대들의 삶은 다른 모든 섬과 영토에서 떨어진 단독의 섬인 것이니 다른 곳을 향해 그대들의 해안을 떠나는 배들이 아무리 많고 그대들은 여전히 비통한 고독에 괴로워하고 행복을 갈구하는 한 점 외로운 섬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소설가 칼릴지브란(Kahlil Gibran)의 말대로 우리는 한 점 외로운 섬이고 그 섬과 섬 사이를 절망적으로 헤엄쳐 가고 싶은 욕구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전화나 만남은 그 섬들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배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를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얘기하고자 하니까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불경 중에 ‘비유경(譬喩經)’에 나오는 ‘흑백에서’의 얘기다.
새 수첩에 옮겨놓은 많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보며 새해부터는 나와의 관계를 이룬 그 소중한 끈들을 최선을 다해 잘 가꾸어 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나를 희생하고 남에게 배려하는 삶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상대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의 이름은 내 수첩에서 해마다 지워지고 있다. 이를 보며 나에게도 혹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을까 마음 쓰이며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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