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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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요란하다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2.12.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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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또다시 한해의 마지막 달, 12월이다.
겨울의 상징인 12월은 가을과 임무 교대식을 막 마친 상태다. 들녘과 산하를 물들이던 가을의 긴 여운은 자취를 감췄다.

겨울바람은 어느새 숲에 정착했다. 엽서 같은 단풍이 사라진 키 큰 나뭇가지를 타고 숲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겨울 숲은 고요하다. 마치 숲의 정령이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숲을 지배하는 듯하다. 높고 시린 겨울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전나무 사이로 동화 같은 풍경이 숲을 맴돈다. 고요와 침묵이 내려앉은 겨울 숲은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온 시간이 기나긴 참선에 든다.
‘시작은 끝, 끝은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어떤 시작의 끝에서 온다. 마침내 겨울은 시작과 끝이 결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화두로 동안거(冬安居)에 든다.
인간에게도 겨울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인간은 자연과 달리 겨울이기를 거부했다. 거대한 자연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부한 채 겨울을 요란하게 하고 있다. 성찰의 시간에 서슬푸른 언어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폭력의 언어들이 서릿발같이 돋아나고 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이버 공간의 댓글은 좀비처럼 몰려들어 상대를 갉아댄다.
정치권이 만든 진영의 이익을 위한 ‘정치공학 프레임’ 덫에 빠져든 것이다. 상대를 파멸시켜야 내가 행복해진다는 논리이다. 진영의 이익으로 위장한 ‘옳음’으로 상대의 무력화에 나선다. 왜곡된 ‘옳음’의 성전(聖戰)에 나서는 전사(戰士)들이다.
‘옳음’과 또 다른 ‘옳음’ 사이로 유혈이 낭자하다. ‘검찰 개혁’, ‘부동산 정책’ 등 인간의 삶과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두고 살벌한 논쟁들이 끝날 줄 모르고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토론과 의견수렴의 민주적 절차는 자기 진영의 ‘옳음’만을 위해 존재한다. 때에 따라서 생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영의 옳음에 기초한 ‘정답’을 미리 정해두고 요식절차를 맞춰나가는 모양새다. 다른 진영의 ‘옳음’은 토론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목표성취를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할 장애물이다. 필요에 따라서 장애물이 ‘적폐’로 규정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옳음도 상대의 옳음을 배척하면 진정한 옳음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옳음이 절차를 무시하면 독단적 옳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옳음이 도리어 적폐가 될 수도 있다.
상대의 옳음을 적폐로 규정하는 살벌한 진영 논리는 포용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의 옳음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올바른 선택인가를, 나아가 상대의 옳음은 무조건 걸림돌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잠시 질주를 멈추고 상대를 향한 적의가 가득한 눈길을 나 자신의 내면으로 거둬들여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옳음이 거대한 진영이익 추구로 순수성을 일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생각이 타인과 국민이 모르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그것은 자기의 세계에 함몰돼 넓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이다. 국민과 유권자는 다 알고 있다. 꼼수와 자신들의 이익추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젠 멈추고 함께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상대를 향한 언어폭력이 구업(口業)이라는 사실을, 나와 상대의 옮음이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 겨울은 내면으로 성숙해지는 시기이다.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며 진일보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성찰의 시간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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