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농부의 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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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농부의 꿈 이야기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2.06.2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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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전라북도 귀농·귀촌 우수사례 공모전 대상작 남원 정성배씨

1막. 이별을 준비하다.
2016년 10월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쁜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출발점을 준비하는 나에겐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무르익어 가는 가을 속 나뭇잎은 청년으로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내게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하는 내겐 그저 외진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을 채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누구는 수시합격 소식에 한없이 행복해했고, 누구는 그 행복들 속에서 묵묵히 문제들을 풀어나가며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격과 불합격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절제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여정이 끝난 2017년 3월, 아이들은 형광등만 보고 지낸 365일의 시간을 뒤로하고, 낯선 설렘이 가득한 캠퍼스의 가슴 뛰는 나비가 됐다. 늘 그러했듯 나의 아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시간을 넉넉히 이겨내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당당히 섰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선생이 아닌 농부로서 첫 발걸음을 놓는 나 자신이었다.

2막 1장. 이제 막 농부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머털도사’의 주인공 ‘머털’은 ‘누덕도사’ 밑에서 도술과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지낸다. 배우는 것도 없이 잡일만 한다며 불평을 늘어놓던 머털이 자신만의 도술을 자연스레 깨우치고 최고의 도사로 발돋움하는 만화의 이야기가 내 삶 속으로 밀려들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도우며, 1등급 상추를 키워내는 비결을 전수해주시기만을 기다리며, 그날그날 주어진 것들을 수행하는 머털이 돼있었다. 너만은 공부해서 농사일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바람 덕에, 공부를 핑계 삼았기에, 농사꾼의 아들이면 으레 자연히 터득한다는 낫질과 괭이질도 내겐 너무도 낯설기만 했다. 무늬만 농부의 아들인 셈이었다. 나의 새로운 인생은, 아득하고 멀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의 어디쯤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2막 2장. 일찍 찾아온 홀로서기
아버지 아래서 차근차근 배워가려던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2017년의 봄이 시작됐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없으면, 사이가 멀어지는 일이 다반사라 하시며, 수해 동안 농사를 이어오시던 하우스 3동을 물려주셨다. 처음 시작하는 일에 두려움이 앞서,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할 테니, 1년만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동안 매달려도 봤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단호하셨다.
그렇게 나의 홀로서기는 시작됐다. 밭을 가는 트랙터는커녕, 고랑을 만드는 관리기의 전진 후진도 모르는 내게, 하우스 3동은 너무도 큰 산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하는 것인지, 멍하니 서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홀로서기의 시작이 참으로 어리숙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 아들 둔 것을 자랑삼으셨던 아버지께, 큰아들의 귀농은 고된 노동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때가 적지 않았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독립해 농사를 지으라고 하신 것도, 그러한 불편함을 가진 아들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3막. 연작피해의 늪
그렇게 3개월이 시간이 흘러갔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 매듭이 풀어졌고, 그 중심에는 늘 아버지가 계셨다. 냉담하시기만 하셨던 아버지였지만, 필요한 순간순간마다 일을 가르쳐주시곤 다시금 돌아가시기를 반복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하나 풀리어졌다. 
일을 배워가며, 상추 농사의 기본을 배웠을 무렵, 뜻밖의 어려움이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하우스 3동에 심은 상추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기를 반복했다. 오랜시간 같은 작물을 반복적으로 재배했을 때 생기는 연작피해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오랜 시간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도, 경험이 많은 농업인들도, 연작피해를 해결하는 방법은 실질적인 해법은 휴경밖에 없다고 하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연작피해에 좋다는 것들을 이것저것 사다가 처방을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악순환의 반복 속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활비는커녕 빚만 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농할 때 들고 왔던 퇴직금이 1년여 만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4막. 수경재배로의 전환
휴경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기술센터와 지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쫓아다녔다. 농사 안 짓고 딴짓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농사일하며 틈틈이 찾아다닌 교육을 통해, 수경(재배)시설로의 변화가 필요함을 알게 됐다. 죽어버린 땅 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큰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멈칫하기도 했으나, 연작피해로 인해 고생하시던 선배 농업인들이 수경시설로 전환해 정상적인 재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설전환을 결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018년 10월, 600평 하우스에 수경 재배시설을 도입했다. 수경 재배시설을 하면서도 많은 두려움의 늪에 갇혀 살았다. 온갖 생각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실패하진 않을까, 시장 상황이 나빠져 이자 내기도 힘들어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 ‘이러다가 정말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되돌아 생각해보면 시설전환은 정말로 큰 결심이 필요했다. 자금이 마땅치 않았던 상황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도 경작해보지 않은 방법으로의 전환은 위험 부담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수경재배로의 전환은 시설뿐만 아니라 경작 방식, 수확 방식, 포장 방식까지 모든 것이, 다르고 낯설었다. 
막막하기만 했던 과정이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움직였다.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이 과정들을 잘 이겨내고 싶었다. 포기라는 이름보다는 극복이라는 단어가 멋있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했다. 수경재배하는 선배 농업인들을 만나고, 시청과 기술센터, 귀농 지원센터를 오가며 교육을 받던 중, ‘스마트팜 청년창업 보육사업’교육생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얻게 됐고, 1기 교육생에 합격해, 수경재배 관련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을 기회가 생겼다. 앞이 막막하기도 한 시간이었지만, 어려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도전은 포기가 아닌, 변화의 길이 됐고, 극복하기 힘들 것만 같았던 어려움은, 초보 농부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끌어안고, 힘든 시간에 괴로워하고 아파하기만 했다면, 지금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겪었을 것 같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다소 부끄럽고 심적으로 어렵더라도, 내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바르게 알리고, 관련 교육들을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 정말 중요함을 깨달았다. 수경 재배시설로의 전환과 경험은 2019년 이후, 꾸준한 시설 확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2017년과 2018년은 농사 포기 직전에 놓여 있던 불안한 초보 농부에서, 1,600평 수경재배를 하는 상추전업농이 되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5막. 농부의 손을 잡다.
2년여간을 고민했던 연작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다시금 생겨난 고민은 시장의 변동으로 인해 농산물 가격이 자주 요동치고, 이로 인해 농민 대부분이 빚을 질 수 있는 상황 속에 언제든 놓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작물 재배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나니, 비로소 판매의 어려움이라는 커다란 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6차 산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마을기업이나 사회적 기업에 도전해 다른 형태의 판매를 진행해야 하는 건 아닌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나아지는 것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혼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던 자만심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뜻이 있는 선배 농부님들을 찾아뵈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이 그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선배님들을 찾아뵈며, 우리만의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농협유통센터로부터‘소포장공선출하회’를 조직해, 마트에 납품을 진행하는 일을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제값을 받지 못해 속상한 농민들만큼이나 농협조직도 농민들의 상황을 극복해낼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됐으며, ‘남원시농협조합 공동브랜드’조직까지 참여해 부산광역시의 대형마트에 납품이 시작됐다. 10여 명의 농부가 모여 시작된 소포장조직은 2019년 4월, 20여 명의 농부가 참여하는 조직이 됐다.
이 경험은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값진 경험이 됐다.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서로가 손을 맞잡고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 나가야 함을 알게 됐다.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6막. 지역을 위한 도전
농부에게 농사를 제대로 짓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농사는 농부의 자존심이기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추 농부 ‘정성배’는 지역에서 필요한 일들을 찾아 도전하는 농부가 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농부의 영역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을 살아갈 나의 터전을 위한 도전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9년, 첫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자그마한 농촌에서 살다 보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눈에 보인다. 애써 외면해보지만, 그 문제가 자꾸만 눈에 와서 밟힐 때가 많다. 시내로 출타를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시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귀농한 후로 마음에 계속해서 남았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적게는 30분, 많게는 두어 시간. 더위와 추위, 땡볕과 비를 피할 수 없는 취약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어르쉼’이라는 쉼터를 조성하는 일에 도전하게 됐다. 어르신들을 위해 시작했던 작은 도전은, 2019년 대한민국균형발전박람회의 지역혁신 사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였다.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도전을 이어가고자 한다. 
2020년,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남원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내가 살아가는 남원시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곳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도전이었다. 선물용 먹을거리가 없다는 관광객들의 니즈 해결을 위해, ‘춘향전빵’과 ‘광한루빵’을 개발했고, 2021년 3월, 남원시의 대표 관광지인 광한루에 카페를 열어, 선물용 먹을거리로 ‘춘향전빵’과 ‘광한루빵’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지인의 만류도 있었지만, 직접 재배한 상추 분말을 넣어 만든 이 빵이 10개월 동안 6만 개가 판매되며, 좋은 성과로 이어져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7막. 농부라는 이름으로.
귀농·귀촌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가끔 농장으로 교육을 받으러 오시곤 하시는데, 그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지막에 꼭 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지역에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하는 동안에 나름의 생각 정리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농부는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 한정된 것 같다. 농부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필요한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도시의 삶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농촌은 사람이 귀하다. 사람이 귀한 농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른 누군가가 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농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해 나아가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처음은 다소 부족하고, 어색할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나가다 보면, 부족한 것들이 하나하나 매워지게 되고, 도시만큼은 아니겠지만, 필요한 것들이 생겨나고, 나름의 재미도 있는 우리의 터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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