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주필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는 가운데 한국의 곡물자급률이 20% 밑으로 떨어지면서 식량안보 ‘안전판’이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대외 곡물 파동에 취약해지며 가뜩이나 고공행진을 하는 국내 물가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 강대국들이 희토류 등 전략물자에 이어 곡물과 식량을 무기화할 경우 수입 의존도가 큰 한국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질 수 있다.
최근 급등하는 국제 곡물가는 향후 물가 충격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전망이다. 통상 선적에서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국제 곡물 상승분은 3~6개월의 시차를 두고 국내 음식료 업체 원재료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주요 음식료 업체들 매출 원가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80% 선에 달한다. 한 대형 식품업계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보유한 곡물 비축물량이 3~5개월치밖에 되지 않는다”며 “대체물량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거래처 변경 비용 등으로 도입 단가가 오르고 제품 가격이 더 올라갈 공산이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물가 대책이 정부 최대 경제현안으로 부각된 상태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곡물자급률을 끌어올리는 농업정책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충돌 같은 전쟁 위험 외에도 식량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변수는 기후변화다. 곡물 생산에 큰 차질을 초래해 곡물 파동이 발생하면 한국은 식량 대란의 한복판에 놓일 수 있다. 한국에서 소비되는 밀 가운데 99%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역대 정부에서 식량안보를 강조한 것이 적지 않았지만 실효성 있는 성과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정부 때는 2017년까지 식량자급률 70%, 곡물자급률 32%를 이루겠다고 밝혔지만 의미 있는 상승을 도출하지 못했다.
급등하는 곡물가격을 방어하기 위해 공공비축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현재 정부의 공공비축 대상 품목은 쌀·콩·밀 등 3개 품목에 그친다. 공공비축 계획도 미흡하다. 밀과 콩은 구체적인 비축 목표가 없고 쌀은 ‘전체 쌀 소비의 17~18%를 유지한다’고 정해놨을 뿐이다.
수입처 다변화와 국내 곡물 생산성을 끌어올릴 필요성도 제기된다. 현재 밀·콩·옥수수 3대 품목은 2~3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밀은 미국·호주·우크라이나에서 80%가량을 들여오고, 콩은 미국에서만 83.9%, 옥수수는 미국·브라질·아르헨티나에서 80% 이상을 수입한다. 또 2009~2019년 평균 정부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을 보면 쌀은 18.7%에 이르지만 콩과 밀은 각각 5.2%, 2.4%에 불과할 정도로 R&D 투자 실적이 저조하다.
곡물대란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곡물수급 안정을 위해 새만금에 최신 저장 설비 등을 확충하는 식의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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