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포퓰리즘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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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포퓰리즘의 위험성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12.2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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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은행(銀行)의 기원은 금(金) 세공업자에게서 시작됐다. 
금이 주요 거래 수단이었던 중세 유럽에서 무게와 부피로 인해 교환성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튼튼한 금고를 갖고 있던 금 세공업자들에게 보관료를 내고 금을 맡겼다. 보관은 물론, 금을 세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격이었다. 물물거래는 세공업자가 내준 금 보관증으로 대신했다. 금을 맡겨둔 사람 중에서 실제 금을 찾아가는 사람의 비율이 10%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세공업자들은 보관 중인 금을 주인 몰래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득을 취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로 화폐와 이자가 생겨난 것이다.

자기가 맡긴 금으로 세공업자들이 ‘돈놀이’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들이 일시에 금을 되찾아갔다. 금 위탁자와 세공업자 사이의 신뢰(신용)가 무너지면서, 요즘으로 치면 ‘뱅크런(Bank Run)’이 일어나기도 했다. ‘금융은 곧 신용’이라는 말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영국이 무적함대를 내세워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에 영국 정부의 신용을 지켜준 영란(英蘭)은행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전 경제학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금융계가 술렁이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 7일 서울대에서 있었던 금융경제세미나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이 부담하고 적게 가진 사람이 적게 부담하는 게 당연한데,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금융”이라며 “(은행이)부자들은 잘 갚는 집단이니까 2% 이내의 우대금리를 받고 원하는 만큼 빌려주지만, 가난하면 안 빌려주고 빌려줘도 조금밖에 안 빌려주고 이자를 높게 내야 한다.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금융의 기본원칙을 무시한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은행은 돈을 빌리려는 사람의 ‘신용’을 보고 대출을 해 주는 것이지,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따져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금융 상식을 사법시험까지 합격한 이 후보가 모를리 없을텐데, 왜 이런 발언이 나왔을까. ‘표(票)’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 후보의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줬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용이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금융 시스템이 존재할 수 없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금융의 붕괴는 곧 시장과 국가 시스템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절감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 후보의 발언은 지난 3월 국무회의에서 “신용도 높은 사람은 저(低)이율, 낮은 사람은 고(高)이율을 적용받는 구조적 모순이 있다”고 발언한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과 흡사하다. 이것이 민주당의 금융철학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후보 발언에 대한 한 네티즌의 댓글이 인상 깊다. “가난한 사람은 국가 지원을 받는데, 부자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럼 부자는 억울한 것인가. 집 없는 사람은 임대 아파트에 ‘생애 최초 주택’ 기회를 얻지만, 부자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럼 부자가 억울한 것인가” 금융과 복지를 혼동케 하고, 부자와 빈자를 갈라치기 하는 이런 포퓰리즘적 발언이 더는 나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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