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공부가 삶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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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가 삶 공부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11.1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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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규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는다.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염세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유한함을 깨닫고 거기에서 과욕을 버리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것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는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부자나 빈천한 자, 권력이 있든 없든, 남녀노소 누구나 죽는다.
둘째, 순서가 없다. 늙었다고 빨리 죽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죽거나,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 먼저 죽기도 한다.
셋째,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든,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단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빈손으로 간다.
넷째, 죽음은 결코 대신해줄 수 없다. 누가 내 대신 밥을 먹어줄 수 있고, 아파줄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지고 가야 한다.
다섯째,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생명이란 두 개가 아니라 단 한 개뿐이다. 한번 끊어지면 회생이 불가능하다. 죽음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시험 삼아 죽어본 다음 저승에서 이승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나온다. 생(生)은 사(死)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고통에 직면한다. 그것이 생로병사이다. 모든 고통은 생(生)으로부터 시작한다. 삶이 있기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뒤따른다. 이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다. 이 세상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늙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세상 종교도 곧 죽음 때문에 생겨났다고 단정하고 싶다. 하지만 어느 종교도 죽음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풀어내고 만족한 해답을 던져주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결국 누구나 맞아야 하는 죽음,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의 종류는 다양하다. 병사, 자연사, 사고사, 자살, 고독사, 존엄사 등 각종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를 바라보고 준비하고 있을까. 살아있다는 그 순간의 즐거움에 취해 다가오는 죽음을 아예 잊고 있거나 남의 일처럼 여기지는 않을까.
죽음의 세계는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삶은 ‘경험’을 통해 ‘어떻게’와 ‘무엇’이 고려되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모든 죽음이 미지의 영역이므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타자의 반응,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다만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삶과,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어디론가 옮겨간다고 생각하고 사는 삶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은 공포 그 자체다. 아직까지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은 없어도 죽기 직전까지 갔다 온 사람은 있다. 그것이 바로 가사상태, 즉 임사체험이다. 그래도 임사체험자들은 죽음 가까이 가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도 귀담아들을만하다.
출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면에서는 죽음을, 다른 면에서는 출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것이 하나는 슬픔을 주고 하나는 기쁨을 줄까? 삶을 사랑하면 죽음도 사랑해야 하고 죽음을 미워하면 삶도 미워해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 삶과 죽음이 함께 시작되며, 우리가 죽는 순간 죽음도 끝난다. 따라서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기조차 끔찍하고 두려운 일로만 여기고 외면해 왔다.
그러나 죽음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죽음 이상의 큰 스승은 없다.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죽음 공부는 삶의 공부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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