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게 풀고, 한 발 물러선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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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하게 풀고, 한 발 물러선 지혜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11.0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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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리 미술평론가, 여수국제미술제 예술감독

동아시아의 화가에게 그림은 손끝에서 발현하는 재주만이 아니라 자신을 수련하는 가치 지향적 도구이다. 빈 화폭(畵幅)은 자유의 황무지이다. 인간 세상에 펼쳐져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화가는 이 가능성의 잠재적 공간에 그리는 행위로 청아한 삶의 태도를 탁마(琢磨)한다. 
이런 전통적 토양에서 성장한 채화성은 매사 정갈하고 단정한 선비이다. 그는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꾸었고, 중국 전통 화법을 충실하게 수련했다. 이미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은 순도 높은 화가이자, 중국 장쑤성 옌청사범대학교에서 산수화와 영묘화(翎毛畵)를 지도하는 교수이다.

그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물설고 낯선 한국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학(留學)길에 나섰다. 2년 전, 필자가 처음 본 그의 작품은 수십 년간 내면화한 필법이 섬세하고 견고했다. 원액이 너무 진해서 물타기 어려워 보였다. 
그런 그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있다. 화가로서 모험에 나선 것. 중년을 넘어선 화가가 자신의 작업 틀을 깨고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것을 기꺼이 해내고 있다.
작가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 있는 연석산미술관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하루에 네 번 버스가 지나가는 오지(奧地)에서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공연히 바쁘고 번잡한 고향에서의 삶에서는 없었던 고독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사람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고요한 주변을 매일 산책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무심하게 계속 걸었다. 그 과정에서 시나브로 자신을 비우고, 자연스럽게 동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관념산수의 틀을 깨고, ‘지금·여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여름의 녹음이 저물고, 초가을에 접어드는 야릇한 시공간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했다. 
몰아치는 폭풍 같은 거침과 비단처럼 섬세하고 고운 세필의 운용으로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더러는 투박한 먹이 담묵(淡墨)을 돋보이게 하고, 유려하게 풀어 헤치고 적절하게 여민 정교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먹 묻힌 붓을 그대로 빠르게 종이에 얹힌 젖은 붓질과 물기를 빼고 가볍고 완만하게 그려낸 마른 붓질이 조화롭다. 이는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한발 물러선 삶의 지혜를 담은 듯하다. 거부하지 않고 한지에 스미는 먹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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