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철학자 소크라테스
상태바
못생긴 철학자 소크라테스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09.07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영규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소크라테스가 지독히 못생겼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외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볏겨진 이마, 두꺼비처럼 툭 튀어나온 눈, 돼지코에 두툼한 입술, 거친 피부, 땅딸막한 키, 불거진 배, 그리고 오리걸음같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등 어느 것 하나 매력이 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외모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용모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우스갯소리를 즐기기까지 하였다. 자기 눈은 사방을 잘 볼 수 있도록 툭 튀어나왔으며, 길고 똑바른 코보다 뭉툭한 코가 냄새를 더 잘 맡는다고 자랑하여 주변을 웃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는 못생겼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하기까지 했다. 그는 일하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늘 돈을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긁기도 했다. 자신은 물론 어린 자식들까지 딸린 집안에서 남편이란 사람이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철학에 몰두하며 밖으로만 떠도니 바가지를 안 긁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産婆)인 어머니 사이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로는 아내 크산티페와 사이에 아들 셋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가난하여 남루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사회 출신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무보수로 이들을 가르쳤고, 기껏해야 저녁 한 끼로 만족하였다. 특별한 수입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나이 51세에 결혼했다고 전해 지지만 아내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비난한 일은 하나의 전설처럼 되어 있다. 아내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심지어 남편을 뒤쫓아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친구들의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소크라테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끈질긴 인내심으로 잘 견뎌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계속 제자와 토론만 하던 소크라테스 머리 위에 크산티페가 물 한 바가지를 퍼부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 비가 쏟아지게 마련이지”라고 말하며 일상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크산티페가 악처로 알려진 것은 몇몇 전해지는 두 사람의 일화가 과장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안다. 최근에는 크산티페가 결코 악처가 아니었을 것이란 반론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비록 돈벌이도 없는 소크라테스지만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버리거나 집에서 쫓아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말년에 재판을 받고 독배(毒杯)를 마시고 죽을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모습은 세상 최악의 악처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고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써진 글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늘 성적 불만이 컸다고 한다. 어느 날 독수공방을 견디다 못한 크산티페가 “왜 부부관계를 멀리 하냐”라고 묻자 소크라테스가 “당신은 아이들의 어머니요, 신성한 모성(母性)이란 말이요. 그 신성한 모성을 어찌 장난감인양 희롱한단 말이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을 모성으로서 존경하겠소”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크산티페가 “뭐라고요! 내가 언제 당신의 존경을 바랐단 말이오”라며 힐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크산티페가 악처인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악부(惡夫)였다는 견해도 있다.
서기전 399년 5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봄꽃 향기가 그윽하게 물들고 있었다. 고희를 맞은 소크라테스는 당시 권력자인 아뉴토스의 사주를 받은 멜레토스의 고발로 아테네의 시민법정에 섰다. 고소 이유는 국가가 정한 신(神)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두 가지 죄목이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사유의 방식인 문답법(혹은 산파술)때문이었다.
재판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로부터 “만약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말로 거절한다. 그는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 360표,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때 그가 말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그 후 친구와 제자들이 탈옥 및 망명을 권유했다. 돈 많은 친구 크리콘이 뇌물을 써서 풀려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내가 도망치면 고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꼴” 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독미나리를 먹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독약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은 소크라테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생각하였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