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참전 실종 미군 63년간 기다린 94세 아내, 마침내 남편 유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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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참전 실종 미군 63년간 기다린 94세 아내, 마침내 남편 유해 돌아오다
  • 허성배
  • 승인 2019.12.2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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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이제야 우리 결혼생활 완결 됐네요. 저는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 남편이 드디어 집에 돌아왔어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 유해가 63년 만에 미국 고향으로 귀환했다. 미군 병사는 지난 1950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아내에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동봉한 카드를 보냈다. 그는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지나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고, 3개월 뒤인 1951년 3월 포로수용소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성조기에 덮인 남편의 관을 마주한 부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63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남편 조지프 켄트 일등상사를 맞이하는 클라라 여사.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진 한국전 실종 미군 조지프. E 켄트 일등상사의 유해가 지난 20일 새벽(현지시각)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켄트 전 일등상사의 부인인 클라라 켄트 여사는 공항에서 남편의 유해를 직접 맞이했다.
클라라 여사는 텍사스의 한 농장에서 18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지겨웠던 그는 시내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을 들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은 1946년 그 열차에서 처음 만났다. 열차에서 클라라 여사에게 처음 말을 건넨 건 남편의 동료였다. 클라라 여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갑자기 남편이 쪽지로 ‘여기(워싱턴주)에서 내리자’고 했다”고 말했다. 그때 클라라 여사의 종착지는 로스앤젤레스였고, 켄트 상사 일행의 목적지는 워싱턴주였다. 켄트 상사는 열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다.
클라라 여사는 처음에 켄트 상사를 유부남으로 오해해 한동안 그의 구애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군인은 대부분 고향에 부인이 있었어요. 게다가 그때 남편은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에 불과했지요. 그 낯선 남자가 내 인생을 걸 만한 사람인지 좀 더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어요.”
켄트 상사는 주 정부 증빙서류를 보여주며 자신이 미혼이라는 것을 클라라 여사에게 증명했고, 그제서야 클라라 여사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때 클라라 여사의 나이는 27살, 켄트 상사는 23살이었다.
두 사람은 열차에서 처음 만난 지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두 사람은 1948년 6월 워싱턴 포트루이스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2년 후인 1950년 켄트 상사는 다시 6·25 참전 길에 올랐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군인이었어요. 그는 군 생활을 사랑했어요. 2차대전에서 복귀한 직후에 바로 다른 전쟁에 지원서를 냈죠. 그게 그의 인생이었어요” 켄트 상사는 미 2보병사단 503포병 부대 C 포대에 지원했다. 켄트 상사는 그가 참가한 전투에서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6·25 전쟁에서는 브론즈스타 메달을 받았고, 2차대전에서는 승리 메달, 필리핀 독립 리본 등을 받았다.
켄트 상사는 집을 나설 때 클라라 여사에게 혹시라도 자신이 전쟁에서 전사하게 되면 재혼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클라라 여사는 그때 남편한테 약속했다. “당신을 제외하고 앞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클라라 여사는 실제 지난 63년 동안 남편만을 기다렸다. 그 긴 세월 동안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을 사귄 적이 없었다고 했다. 클라라 여사는 기자들 앞에서 “결국 저는 여기에 그 사람의 아내로서 있어요. 그리고 저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부인이에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클라라 여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워싱턴 D.C에서 미국 참전용사의 미망인 및 가족들과 함께 행방불명된 참전용사를 찾는 집회를 열어왔다. 미국에는 지금도 약 8만 명의 참전용사가 행방불명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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