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마지막 달력을 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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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마지막 달력을 떼면서
  • 허성배
  • 승인 2019.12.1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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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옛말이 있지만 급변하는 세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사다난했던 기해년(己亥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명멸하는 가운데 벌써 1년이 속절없이 지나고 지난날의 숱한 애환(哀歡)을 제야(除夜)의 종소리에 실어 보내야만 하는 세밑이 가까워지고 있다.

연말을 향해서 치닫는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왠지 안절부절못해지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마저 무엇인가 초조하고 침울하게만 느껴진다. 정초에 저마다 이루어 보겠노라고 계획했던 1년 지대 계(一年之大計)도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무위 허사다.
지난 한 해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했던가(?) 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허전함을 달래보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심정일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인생은 속고 살며 기대 속에 사는 것이니 지난 1년 동안 만족스러운 성과가 없었더라도 목표를 겨냥하여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는 욕구 속에 사는 것이 우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하고 자위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의 앞날을 내다보며 그려보는 비전… 이것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발전이나 행복감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벌써 상가의 쇼윈도에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즐비하게 진열되고 징글벨의 노랫소리와 함께 연말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 성급한 친구들은 연하장 찍기에 바쁘고 송년회의 스케줄 짜기에 정신들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는 수많은 성인과 철학 서적이 있으나 역시 삶이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며 각자의 삶은 특유하기 때문에 자기 생의 의미는 스스로가 부여하고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직업이나 사는 방법 생각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패턴 속에 묶여 살아갈 수는 없다.  여기에 생의 슬기와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12월이 되어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나의 경우 뉘우침과 부채가 많기 때문이다.  더 욱 더 슬기롭게 부지런히 많은 일을 하며 살지 못했다는 뉘우침(그것은 해마다 똑같은 뉘우침이지만)의 부채·인정의 부채 등 많은 부담 속에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 무척 즐겁고 가슴 벅차기만 하던 젊은 날도 있었다.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새 옷들과 친척과 친구들의 만남 모두가 걱정 없고 과욕 없이 순진한 날의 넘치는 기쁨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거닐던 일 조그만 선물들을 정성껏 포장해 나누던일 1년 내내 소식 없던 친구들까지 한 장의 카드에 한마디의 정겨운 말을 담아 주고받던 일 모두가 부채나 의무가 아닌 소박한 인정이요 넘치는 기쁨의 날들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잘살게 되고 번영한 사회활동 가정생활 속에서 연말의 행사도 모두가 벅차고 헛된 것이 되어 힘에 겨운 선물이 오가고 마음에도 없는 수식어로써 수백 장씩의 인사장을 내야 하는 현대화된 연말은 우리를 소박한 기쁨보다는 무거운 짐과 초조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요즈음 텔레비전을 보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태의 실상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픔이나 괴로운 일일망정 가득히 담겨 있는 것이 삶의 무게라고 생각한다. 고뇌나 회한이라도 좋다. 반추하며 생산하며 꿈꾸는 삶이 진정한 보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오늘의 사회는 복잡하고 생존 경쟁에 급급해서 인간의 틀마저 소홀해진 감이 없진 않지만.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인간의 선한 우정만은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제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백팔(百八)의 번뇌가 송년주(忘年酒)의 한잔에 회포를 달래며 지난 한 해를 반성해 보고, 희망찬 새해(庚子年)를 향해 사회가 안정되고 알찬 설계를 해 보고 싶어지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다가오는 제야와 함께 모든 국민이 화합하며 선진 민주화를 위해 매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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