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주필
11월 9일 집권 반환점을 돈 문 대통령은 이미 험난한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취임 초 80%를 넘었던 지지율은 국정 운영 난맥상으로 반 토막이 났다. 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과 반일 감정 자극 등 깜짝 이벤트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런 전술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생겼다. 말로가 불행했던 역대 대통령들보다 문 대통령은 더 불행한 길을 걸을 수도 있다. 한국 경제는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위기에 처하는 등 갈수록 암울해지고, 남북·한미·한일·한중 관계 등 외교 안보 상황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고, 국론은 통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 쪽 났다. 국정 과제들이 후반기에 성과를 낼 것이라는 말은 희망 고문에 불과한 ‘정신 승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문재인 대통령 퇴진’ 구호가 일반 국민에게도 익숙해진 것은 지난 10월 3일 광화문 광장 집회 때부터다. ‘태극기 부대’ 등 일부 단체가 집권 초부터 대통령 하야를 주장했지만, 개천절 집회에선 광화문 앞에서 서울 시청 앞 광장까지 가득 메운 대규모 군중이 “문재인 물러나라”고 외쳤다.
조국 사태에 대한 분노가 직접적 계기였다. 이는 집권 후반기인 2016년 10월 ‘최순실 사태’로 같은 장소에서 대규모 퇴진 요구가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시기적으로 이르다. 국정 기조와 정책의 전환은 국민과 약속한 대선 공약 위반이자, 자기부정이기에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단맛을 즐긴 기득권 노조와 이념적 좌파 인사 등 문 대통령 핵심 지지층은 문 대통령을 배신자라며 총공격을 가할 것이다.
독일의 좌파 정치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2000년대 초 노동 유연성 강화, 세율 인하 등 과감한 개혁안을 담은 ‘어젠다 2010’을 추진해 유럽의 병자로 불린 독일을 제조업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개혁에 대한 반발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해 권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성공한 국가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정권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결기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했다. 부마 민주항쟁 등 이전 정권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정부를 대신해 사과했지만, 정작 본인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잇단 인사 실패에 대해 “송구스럽다”고 하면서 야당의 정치 공세를 탓했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 대해서는 언론의 성찰을 요구했다. 최저임금을 역대 최대인 16.5% 올려놓고서 심의 위원들이 이전 정부에서 임명됐으니 우리가 올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판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성찰이 없으면 신뢰를 받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은 반대파에 가혹했다. 정권 초반 적폐 청산에 앞장서며 말을 잘 듣던 검찰이 조국 사태 때 자기 뜻을 따르지 않자, 반인권 적폐 집단으로 몰아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복수심이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 대통령의 태도는 냉혹했다. 경제를 살리겠다면서도 경제 5단체 중 전경련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전경련이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D)과 일본형 장기 불황(J), 경기 침체(R) 등 ‘DJA’ 공포가 엄습하는데도 말이다. 문 대통령은 서해를 지키다 순국한 호국 영령을 기리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다. 관용이 없으면 국민 통합은 불가능하다.
정책을 전환하는 용기와 잘못을 인정하고 되돌아보는 성찰, 반대파를 끌어안는 관용 등 세 가지 자세로 집권 후반기에 임한다면 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세 가지 중 꼭 해야 할 한 가지를 꼽으면 관용이다. 정책이 실패하면 정권을 내놓으면 된다. 성찰하지 않는 경우라면, 미움을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관용이 없다면 국민 통합은 요원하다. 국민을 갈라놓고, 나라를 두 쪽 낸 지도자는 역사의 죄인으로 남는다. 국정농단보다 더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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