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그 후의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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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그 후의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 허성배
  • 승인 2019.09.0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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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2018년 3월 8일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조윤제 주미대사가 배석한 가운데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논의한 결과를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았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 건 지난해 3월이었다. 정의용 청와대국가안보실장이 미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북미정상회담 성사를 발표하고 서훈 국정원장과 정 실장은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들고 와 미국 측 외교ㆍ안보 및 정보 수뇌부가 배석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특사단에 논의 결과를 발표토록 요청하고, 스스로 브리핑룸으로 가 기자들에게 알렸다.

이 발표를 놓고 백악관 출입 기자 여러 명이 자괴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미 NSC(국가안전보장회의)가 해야 할 발표를 한국 NSC로부터 들어야 했다는 점이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그 발표문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 밀도가 있어, 짧은데도 몹시 길게 느껴졌다. 김 위원장의 메시지 세 가지뿐 아니라, 미 대통령과 주변국 입장 그리고 최대 압박 정책은 지속해야 한다는 방향성까지 빠짐없이 담겼다. 대북 정책을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다루듯 한다”는 문 대통령의 말이 실감 났다.
1년 반 만인 지금 모든 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미정부 당국자들과 언론이 브리핑과 익명 코멘트를 통해 한국 외교에 쏟아붓는 비난은 마치 비난용의 사례집 같다. “잘못 이해 (Misapprehension)”, “분별없음 (Ill-advised)”, “어리석은(Stupid)” 그리고 “레드 라인”.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지칭한 말들이다. 레드라인은 일본이 먼저 넘은 것 아니냐는 우리 반론에 대해 국무부는 바로 “주한미군의 위험을 증가시킨 조치”란 반응을 내놨다.
뉴욕타임스는 미 관리들이 “국내정치 맥락에서 한국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결정 배경을 의심한다는 뜻이다. 지소미아 파기를 “미국이 이해했다”는 청와대 발표를 노골적으로 부인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의 발표들은 거듭될 때마다 시간만 길 뿐 정곡을 피해간다. “한미동맹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란 말은 아예 시니컬하게 들린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강기정 정무수석의 말은 마치 그릇을 내던지는 모습이다.
지소미아 종결의 득실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다. 정보 교환의 득실, 북한 위협에 대한 심리적 효과 등 직접 영향은 적지만, 정치, 경제, 대외관계 등에 걸치는 파급 효과는 하나하나가 너무 크다. 그런데 정밀 타격해야 할 지소미아 카드를 거칠게 휘두르는 느낌이다. 한미동맹도 여기까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미국에도 한미동맹을 의문시하는 시각에 맞서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가을 워싱턴 포스트의 보브 우드워드가 쓴 책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에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책은 게리 콘 경제보좌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파기하는 짧은 문서를 트럼프 대통령 책상에서 훔쳐 몰래 감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더 생생한 장면은 2017년 여름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 등이 트럼프 대통령을 억지로 포토맥강 건너 미 국방성 보안회의실인 탱크에 초치한 대목이다. 매티스 장관이 동맹과의 안보 조약과 미국 주도의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던 중, 트럼프는 몇 마디 내뱉고 떠나버린다. “허튼소리 마! 망할 것 파기해버려! 전혀 상관 안 해(Pull the fucking thing out! I don’t give a shit).” 매티스가 설명하고 트럼프가 망할 것이라고 가리킨 것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다.
책 제목은 권력이 공포에서 나온다는 트럼프 발언에서 나온 것이다. 문재인 외교가 미국과 북한, 주변국 중심에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던 힘은 한 치의 빈틈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유리그릇을 다루는 조심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아베를 치려다 엉뚱하게도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 내 세력을 친 게 아닌가. 극일의 방법으로 남북협력을 얘기하면서 정작 그 추동력이 약해지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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