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정치 아닌 경제 논리로 풀어야
허성배 주필
문민 시대는 정치 논리의 시대인가 보다. 국민 정서 라면 안되는 일이 없다. 아무리 경제 논리에 맞는 정책일 지라도 정치 논리에 어긋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정부의 역점 사업이라던 규제 완화도 미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던 개방도 정치 논리에 부닥쳐 좌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 논리는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주장 하면서도 수입품의 가격이 높다고 아우성 치는 것이 정치 논리다.
수입품의 가격이 낮을 수록 국내 산업이 불리해 짐에도 또 기업이 소비자에게 봉사 하기 바라면서도 비효율적 기업의 도태(淘汰)는 원치 않는 것이 정치 논리다. 경쟁은 적정 해야 하고 정부는 기업의 도산(倒産)을 막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도산의 위험이 없다면 기업의 효율성도 기대할 수 없다.
경제 논리는 경쟁의 논리다. 일부 국민은 경쟁 이란 말에 못마땅할 지도 모르겠지만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는 살만한 사회가 아니라고. 그러나 경제 논리가 말하는 경쟁은 그런 경쟁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더 잘 봉사 하는자 만이 살아 남는 경쟁이다. 기업끼리의 경쟁이 치열 할 수록 소비자들은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를 위한 과당 경쟁이나 과잉 투자는 경제 논리의 기본인데 반해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경영에 판단을 잘못 했으면 망해야 하고 잘했으면 부자(富者)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 논리로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너무 큰 부자가 있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망하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된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경제 논리와 정치논리 간의 갈등은 우리 나라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경제학자들은 원시 종족이나 화석 연구를 통해 집단주의와 온정주의가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 깔려 있는 본능임을 밝혀냈다. 정치 논리는 그런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제논리에 기초한 개인 주의사회 보다 서로 돕고 사는 따뜻한 사회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집단주의나 온정주의에 기초한 정치논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것을 주장하는 학자·정치인은 정의로워 보인다. 논리가 치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거기에 공감한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겨난다.
그러나 경제논리는 동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민 정서에 잘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자 이익을 대변 하는 것쯤으로 매도(罵倒)되어 버리기도 한다 정치논리와 다른 점이 있을 때 자신이 옳음을 입증 해야 하는 책임은 늘 경제논리 쪽으로 돌아 간다.
그래서 경제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경제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바보스런 짓이 돼 버렸다. 그러나 정치논리가 우리 경제를 지배하는 한 우리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이다.
16세기 이후 영국과 스페인이 걸어온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당시 두나라 모두 봉건제 에서 절대 왕정으로 넘어가는 비슷한 상황에 있었으나 택한 길은 아주 달랐다. 영국은 경제논리에 바탕을 준 자유와 개방을 택했다. 그결과 그들은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을 이루었으며 스페인을 누르고 세계를 제패 했다.
반면 지금의 우리처럼 방대한 관료제와 보호 주의를 택한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또 영국의 경제 논리를 우선 하는 전통이 신대륙에서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을 만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페인의 전통은 중남미 국가 들의 낙후로 이어졌다.
경제논리를 무시 하고서 우리가 세계 열강 대열에 동참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도 그 원리를 주장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흔히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경제논리를 주장 하다가도 정치인이 되면 정치 논리로 돌아 선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 않으면 표를 잃을 테니까. 그러나 무작정 국민정서를 좇기 보다 국민에게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진솔하게 설득 하는 것이 미래국익을 위한 올바른 일이 아닐까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