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인생 목표 이룬 불굴의 한국인
상태바
3가지 인생 목표 이룬 불굴의 한국인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06.29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만석 학교법인 세인학원 이사장

“기독교 정신으로 미래의 생활을 준비하는 성실한 세계인을 기른다.” 인생의 3번째 목표로 설정된 세인고등학교를 설립한 조만석 세인학원 이사장(75·익산영생당한의원원장).

지난 10년의 세월 속에는 ‘진리, 사랑, 순종’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교육 사업에 몸 바쳐온 조만식 이사장(74세)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세인고는 ‘진리안에서 깨어 항상 참된 생활을 하는 사람,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며 헌신 봉사하는 사람, 순종으로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최고 대안학교로 유명하다.

5차원 전면교육인 지력, 심력, 체력, 자기관리 능력, 인간관계능력 등 5가지 기본능력을 전반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타고난 소질과 재능(Diamond Collar)을 최대한 신장시켜 21세기를 주도할 다이아몬드(Diamond Collar)의 세계인으로 기르기 위해서다.

‘세인’은 ‘가나안’과 같은 뜻으로 ‘세계를 품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의미다. 그가 세가지 인생 목표를 세운 것은 2만원짜리 전세에서 살며 무허가 한약방을 운영하면서부터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신유의 은사’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육신의 병은 침이나 한약을 통해 치유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병은 믿음을 통해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명의(名醫)이다 보니 무허가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1968년 한약업사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고 간판을 내걸자 손님들은 부쩍 늘어났다. 2003년에는 의료법인 세인반석의료재단을 설립하고 의원도 신시가지 어양동에 5층 연건평 2천평짜리 빌딩을 짓는데 성공했다.

그의 두 번째 목표는 교회 설립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이상적인 교회를 설립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여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싶어서 였다. 1972년 6월 1일 창인동 영생교회의 대지 312평에 기존 건물 창고 1동, 주택 2동을 매입해 그해 6월 25일 창립예배를 가졌다.

하지만 신령한 종이라고 하는 모 전도사를 초청, 부흥회를 한 것이 화근이 됐다. 교회가 분열과 혼란에 빠졌고 200여명에 달했던 교인의 수 역시 60여명으로 줄어드는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가난한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성전 건축을 짓기로 작정했다. 당시 집한 채 없는 고구마 밭이었던 부송동 일대 1,170평을 시작으로 모두 2,163평을 매입, 1995년 이곳에 연건평 1200평 규모의 성전을 짓는데 성공했다.

건축업자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도망가는 일도 있었지만 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차장부지 700평과 교육관용 1130평도 구입했다.

그의 마지막 목표는 학교 설립이다. 지적교육은 물론 인성과 지성과 영성을 갖춘 교육을 통해 민족과 인류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할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세인고교 설립은 우연이었다. 당시 5차원 전면교육을 개발한 원동연 박사가 이 방법으로 교육하기 위해 전주사람들과 폐교를 계약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IMF가 발생하면서 설립 기금이 걷히지 않아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는 곧바로 원박사를 만나 5차원 전면교육(지력, 심력, 체력, 인간관계, 자기관리)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폐교를 인수했다.

1998년 건학이념이 담긴 ‘진리, 사랑, 순종’의 이념과 5차원 전면교육, 달란트교육, 말씀교육을 통한 인성, 지성, 영성을 갖춘 믿음의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인고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부터 기숙사 신축에 이어 2001년 3층으로 증축, 2002년 어학실 신축, 2005년 3학급 증설 승인도 받았다.

세인고는 문제아만을 받아들여 인성교육, 지적교육, 신앙적 훈련 등 3년만에 새사람이 되어 대부분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지금은 10대1의 경쟁률을 보이는 등 전인교육 모델학교로 우뚝 서게됐다.

네번째 목표는셋방살이 시절, 목표에는 없었다. 하지만 시대적 요청이었다. 세인복민학교 설립이다. 서구 자본주의 유입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한탕주의, 쾌락문화의 만연 등 정신적 피폐현상이 일어나다보니 가나안농군학교처럼 의식개혁을 담당하는 교육이 필요했다.

계획을 세우면 즉시 실천에 옮기는 그는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장로를 만났다. 그는 호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농군학교를 세우자며 전 국민을 상대로 의식개혁에 동참할 것을 제안, 합의했다.

먼저 부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 경치좋은 30만평이 나왔지만 산세가 험할 때로 험했다. 의식개혁에 필요한 개척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은행대출을 받아 즉시 매입해 가장 먼저 교회건물을 짓고 교육시설, 사택 등 순으로 건물이 세우고, 1989년 가나안복민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01년 연면적 600평에 최대 수용인원 500명의 현대식 4층 영성수련센터및 청소년수련원도 초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그의 앞으로 목표는 ‘전인치료원’ 설립이다. 세인복민학교 마스터 플랜에 포함된 전인치료원은 자연, 음악, 의학, 민간진료에 신앙치료, 운동치료까지 겸하고 있다. 이외에 복지시설까지 갖출 계획이다.

그는 한방은 물론 일반, 기독관련 봉사활동 등 익산지역 봉사활동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생은 60부터며 그전은 연습인생이고 이후에는 성숙한 삶을 사는 인생이다”면서 “사실 60~70세 사이에 세인고 설립, 청소년수련원, YMCA활동, 교회 설립 등 많은 일들을 했다”고 말했다.

창영조씨 경태 공과 신덕순 여사의 1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가족으로는 해주오씨 경일 여사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뒀다./엄범희 기자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