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10주기]①"시련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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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10주기]①"시련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다"
  • 투데이안
  • 승인 2011.03.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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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올해로 고인이 된지 10년이 됐지만 아직도 정주영의 정신은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130여점의 사진 속 정주영은 지금이라도 걸어 나와 거친 세상을 앞장서 헤쳐 나갈 듯 생생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한국 경제가 한 단계 올라서는 현장마다 정 명예회장은 두 다리로 우뚝 서 있었다. 여름철 직원들과 모래판에서 웃통을 벗고 씨름을 하는 칠순의 정주영은 활기찼고 의욕이 넘쳤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보국, 아산과 현대가족, 아산의 꿈, 대한민국을 위한 앞선 발걸음, 아산의 향기 등 여섯 가지 테마로 나눠 전시된 130여점의 사진은 정주영 자신의 역사 기록에 멈추지 않았다. 한국 경제 60년사의 산 증거들이었다.

그가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되뇌던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사진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 했다.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 우리와 길을 달리한지 10주기를 맞았지만 아직도 그의 경영철학은 살아있어 현세의 경영자들을 죽비로 내리친다.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그의 빈자리가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불꽃같은 삶이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이루고 또 많은 것을 이룩하라고 가르친 그의 삶과 리더십, 경영철학, 대북사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파란만장했던 86년 삶이 위기의 시기에 다시 회자되는 이유다.

◇시련에 물들지 않는 강인한 정신

그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곧은 성품을 가진 개척자였다. 학업은 소학교가 마지막이었지만 방대한 독서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고, 쓸데없는 억압에 굴하지 않고 뚜벅뚜벅 앞을 향해 걸었다.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을 피해 네 차례에 걸친 가출을 감행해 복흥상회(쌀 소매업)에 배달꾼으로 취직한다. 간난고초의 노력 끝에 주인에게 인정받아 쌀가게를 넘겨받는다. 1940년에는 서대문구 아현동에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창업했다.

이것이 훗날 현대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이 된다. 전후 복구 건설사업에 주력한 현대건설은 1957년 최대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맡아 일약 대형건설업체로 부상했다.

시멘트 국산화에 뜻이 있었던 그는 1964년 6월 단양에 20만t 규모인 현대의 첫 생산공장(시멘트)을 준공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한 정주영은 그 무렵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포드의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면서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했다.

세계가 정주영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현대중공업 창업 당시다. 이 때 그 유명한 일화가 등장한다.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와 조선소를 지을 모래사장 사진 한 장으로 선박을 수주한 것이다.

특히 대형선박 건조 경험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공장 건설과 동시에 26만t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했다. 2년3개월 만에 조선소 건설과 배를 함께 건조하는, 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1976년에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 모델인 '포니'를 수출했고, 1983년엔 현대전자산업을 설립해 중공업·건설·자동·차전자를 주축으로 하는 중화학그룹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1977년에는 사회복지재단도 만들었다. 자신이 갖고 있던 현대건설 주식 50%를 흔쾌히 출자해 재단을 설립하며 "현대는 그동안 건강하고 유능한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성장해 왔다. 현대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주영이 매번 성공신화만 쓴 것은 아니다. 기업인으로서 한계를 느끼던 그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통일국민당을 스스로 창당해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해 5월15일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정주영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는 등 그룹의 측면지원까지 받았지만 참패했다.

대선 실패로 현대그룹에는 한겨울 한파가 몰아닥치게 된다. 정 명예회장에게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군사정권이 물러가면서부터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해 6월 정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대그룹은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키게 된다.

정주영은 자신의 호를 딴 현대아산을 세워 대북사업을 전담케 했다. 실제로 소떼 방북 3개월 뒤 현대 금강호가 출항하며 현대의 대북사업이 본격화됐다. 이 대북사업이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고 3년 뒤인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전쟁과 가난, 끝이 보이지 않는 좌절감에도 굴하지 않았던 정 명예회장은 그러나 소떼방북 후 꼭 3년 뒤인 2001년 3월21일 86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정면 돌파하며 현대그룹을 키우고 대북사업을 진두지휘했던, 수많은 짐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홍구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0주기 추모委 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인 정주영은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해결책을 찾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번 해보는거다'며 밀어붙일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고 동시에 생각은 언제나 열려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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