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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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다네.
  • 엄범희 기자
  • 승인 2010.02.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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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한바탕 웃고 떠들며 묵은 회포를 실컷 풀고 난 뒤 친구들이 하나 둘씩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쓴 술잔을 털어 넣으며 쏟아내는 말들 역시 하나같이 씁쓸한 것들뿐이었다.


“난 희망이 하나도 없다네.”
“직장에서 더 이상 올라갈 자리도 없고, 정년이 앞으로 고작 8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퇴직 후에 뭘 해야 할지 앞이 정말 깜깜하네.”
“결혼을 늦게 해서 막내 녀석이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대학에다 결혼 뒷바라지까지 할 생각을 하니 참 막막해.”
“중화요리 만드는 기술 같은 걸 배워서 장사라도 해 볼까, 이 궁리 저 궁리 해봤는데, 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네.”

어느새 술상 위에는 중년의 무게로 인한 푸념들과 걱정거리들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술잔을 채우는 속도가 자꾸만 빨라졌다.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직장만을 위해 희생했는데, 이제 겨우 계장직급이라며 하소연을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명예퇴직 0순위로 아슬아슬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직장동료들에게 눈치만 보이고 능률도 안 오른다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용문제는 IMF 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생애주기 중에서 경제 지출이 가장 많은 4-50대 직장인들은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란다.

오죽하면 ‘사오정’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겠는가. ‘샌드위치 세대’, ‘능률 없는 구조조정 0순위 세대’로 칭하는 중년 남성들이 오늘도 고개를 힘없이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회사와 집 사이를 방황하듯 오가고 있다.

나는 무거운 마음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잔을 들었다. 친구가 술잔을 부딪쳐 오며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자네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자네는 명예퇴직도 없고, 구조조정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늘 자네를 도와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네.”

내가 식당에 앉아있으면 누군가 음식물을 가져다주고, 행사장에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먼저 와서 아는 체를 해주고 하는 것이 부러워 보였나 보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다른 이의 안락과 행복이 더 커 보이는 법인가 보다.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고통의 경중을 어떻게 가늠하랴마는 나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네는 내가 참 부러운 모양인데, 난 자네가 부럽다네.

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가져다주는 음식만 먹어야 하니 얼마나 불쌍한가?

그리고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할 수 없어서 상대방이 아는 체를 해주지 않으면 누가 왔는지 모르니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또 자네는 나에게 명예퇴직이니, 구조조정 같은 게 없어서 부럽다고 했지만 난 명예퇴직을 당해도 좋고 구조조정을 당해도 좋으니 직장이라는 곳을 다녀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코딱지만한 직장이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아나?

난 이력서를 받아줄 회사가 한 군데도 없다네.

또 자네는 퇴근해서 집에 가면 토끼 같은 어린 자식이 달려와 자네 품에 안기지 않는가?

난 말일세, 두 아들 녀석 모두 군 복무중이라 집에 가면 조용하다네. 텅 빈 거실을 더듬거릴때마다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나지.

그리고 직장동료들과 회식도 즐기고, 야유회 가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네.”

친구는 입을 벌리고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헛기침을 했다. 혀 꼬부라진 음성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으음, 자네 말을 들어보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먼.”

친구 푸념을 들어주려다가 결국에는 내 푸념만 늘어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친구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친구야! 이제 겨우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잖은가. 우리 열심히 살아 보자구.”

나는 친구에게 열심히 살자는 짧고 굵은 한마디를 해 주었다. 그리고 못다 한 말들은 나의 심장 한 구석에서 쿵쿵 울리게 내버려 두었다.

친구야, 세상은 참 살만한 것 아닌가? 슬럼프는 이겨내라고 있고, 넘어짐은 일어서라고 있고, 장애물은 뛰어 넘으라고 있잖은가?

우리 힘을 내자구. 바가지만 박박 긁어도 등 밀어줄 여우같은 아내가 있고, 옹알거려도 웃음꽃 피우는 토끼 같은 녀석들이 있잖은가.

그리고 외롭고 고달프고 서러울 때 쓰디쓴 소주 한 잔 마셔줄 친구가 있지 않은가!

자, 우리 다시 기운 차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내일의 희망을 위하여, 그리고 십년 후, 삼십년 후의 나의 자화상을 위하여.

자! 건 배/송경태 전주시의원, 시각1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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